강정한 변호사.jpg
▲ 강정한 변호사

판결문 하나가 247쪽이다. 다 읽는 데는 상당한 인내를 요한다. 이른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재판의 1심 판결이 나왔다. 병합 심리된 사건까지 합하면 모두 7명의 피고인에 대한 단죄가 있었다. 김기춘은 징역 3년의 실형을 받았고, 조윤선은 블랙리스트 부분에 대하여는 무죄판단을 받은 끝에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다.

지면상 제약으로, 나머지 피고인들의 죄상에 대한 구체적인 범죄 사실을 모두 거론하기는 어렵지만, 피고인 조윤선이 무죄판단을 받은 부분에 나타나 있는 전 정권 실세들의 행태에 대하여 이렇게나마 알리는 일은 엄중한 의무로까지 느껴진다.

1심 재판부는 “2014.9. 부산국제영화제가 다이빙벨 상영계획을 발표하자 김기춘 비서실장이 실수비(비서실장이 주재하고 대통령 수석비서관들이 참여하는 회의)에서 다이빙벨의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을 막으라는 지시를 하였는데, 조윤선 정무수석은 이러한 회의에서의 지시 등에 따라 다이빙벨 상영 문제를 비서관들과 논의하고 대책을 지시하였다. 그 대책으로는 국회를 통한 문제 제기, 시민사회를 통한 부정적인 여론조성 등이 있었고, 상영이 강행되는 경우 좌석을 일괄 매입하는 방안 등도 논의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2014. 11. 25.경 신은미가 쓴 ‘재미 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라는 도서가 2013년 상반기 우수도서로 선정된 사실이 언론을 통해 보도된 후 청와대 실수비에서 이에 관한 문제 제기가 있었던 사실, 정관주 소통비서관이 그 무렵 신은미 도서의 우수도서 선정 취소 문제에 관하여 김소영 문체비서관에게 문의한 사실, 조윤선 정무수석이 그 무렵 (직속부하인) 정관주 (소통비서관)에게 우수도서(세종도서) 심사위원 추천 문제를 문체비서관실과 협의하라고 지시한 사실 등이 인정된다”는 설시도 발견된다.

위와 같은 사실인정에도 불구하고 조윤선은 문예 기금 지원심의 등 부당개입이나 영화 관련 지원배제 및 도서 관련 지원배제 부분(각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강요)에서 모두 무죄판단을 받았다. 증인들이 특검에서의 진술을 별다른 이유 없이 법정에서 번복하거나 “유독 조윤선에게만은 보고하지 않았다”고 증언한 데 따른 것이다. 결국, 재판부는 조윤선이 블랙리스트의 작성과 운영 등에 있어서 기능적 행위 지배를 담당하였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고 달리 증거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석방된 조윤선은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라고 말했고 유죄로 인정된 위증 부분에 대하여도 항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다. 이 판결로 인하여 블랙리스트의 직접 피해자인 문화예술인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의 가슴에도 너무나 큰 상처가 생겼다. 물론 특별검사가 더욱 성실하게 준비하여 1심이 미흡하다고 판단한 증거를 충분히 보강할 것을, 그리하여 항소심에서는 결론이 달라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깨어 있는 우리다. 혹시 조금 느리더라도 진실은 결국 발견되고 말 것임을 이 사건 피고인들까지도 굳게 믿고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국민이야말로 이를 굳게굳게 믿는다.

다시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 Jr.)의 글을 인용한다. ‘나라 없는 사람(A Man Without A Country)’에 나오는 정신이 번쩍 드는 글이다. “모든 권력은 억측가들의 손에 있었다. 이번에도 그들이 승리한 것이다. 병균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 우리도 똑바로 주시해야 할 억측가들에 관한 사실 하나가 드러났다. 우리도 정신 차려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들은 생명을 구하는 데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 그래서 아무리 무지하더라도 그들의 억측이 언제까지나 유지되는 것이다. 그들이 증오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현명한 사람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현명한 사람이 되어 달라. 그래서 우리의 생명과 당신의 생명을 구하라.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 달라”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