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이 빚은 조각 ‘주상절리’ 따라 시간의 강을 건너다

후덥지근한 날씨다. 비라도 오려나. 후끈 달아오른 포장도로 열기를 받으며 구룡포 시가지를 빠져나가자 다시 해안도로다. 바다를 앞에 둔 고만고만한 민박집들이 문을 활짝 열어 놓고 피서객 맞을 준비로 바쁘다.

구룡포해수욕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돌기둥에 ‘새골’이란 글씨가 또렷하다. ‘새골’은 옛 지명이고, 지금은 크게 번창시킨다는 뜻의 대신리(大新里)로 바꿔 부르고 있다.

하루에 일만 명은 거뜬히 수용할 수 있다는 반달형의 구룡포해수욕장 백사장이다. 발밑에 모래가 벨벳 융단 위를 걷는 것처럼 부드럽고, 한더위에도 불구하고 간헐적으로 들이치는 파도에 발목까지 시리다. 여기서 매해 ‘오징어 맨손잡기 체험 및 구룡포 해변축제’가 열린다 한다. 그때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까, 진풍경을 짐작해 본다.
구룡포 해수욕장
구룡포7리교를 건너 바닷가 언덕 위에 아름다운 그늘막이 길손을 기다리고 있다. 동쪽으로는 바다, 남쪽으론 구룡포해수욕장, 북쪽으로는 구룡포 삼정리 주상절리를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전망대다.

구룡포 삼정리 주상절리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화산이 폭발하는 모양을 연상할 수 있는 형상이다. 당시의 용암 폭발 지점과 분출 장면이 그대로 멈춘 듯하다. 구룡포 용 열 마리가 승천하다 한 마리는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을 생각해 본다. 저건 용의 비늘, 이건 용의 발, 저기 저 반도처럼 생긴 것은 순식간에 굳어 버린 용의 몸짓이 아닐까. 엉뚱한 상상도 해 본다.

삼정리 해안길이다. 그렇게 무덥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잠시 비를 피해 삼정항 아담한 정자로 올라선다. 삼정(三政)은 옛날에 3정승이 살았던 곳, 혹은 삼정승을 지낸 분이 살았다는 얘기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구룡포 삼정리 주상절리
구룡포 삼정리 주상절리 (2)
동쪽 바다에서는 보기 드문 섬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삼정섬이라고 불리는 이 섬은 관풍대(觀風臺)라고도 하며 소나무가 울창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바람 맑고 달 밝은 밤이면 신선이 놀았다 한다. 지금은 섬까지 방파제가 연결되어 있어 낚시꾼들이 많이 찾아들고 있다. 섬 입구에는 횟집 하나가 성업 중이다.

그사이 비는 그치고 하늘이 감쪽같이 맑다. 길을 재촉하는 포구에 햇살이 비춰들고 있다. 전망 좋은 바닷가, 넓고 예쁜 정원을 가진 지중해풍의 건물(포스코 페밀리수련원)에 눈길을 주며 오른쪽 내리막길로 내려선다. 여기에도 마을 초입임을 알리는 돌기둥이 서 있다. 두일포(斗日浦)는 마을 뒷산의 모양이 말(斗)을 엎어 놓은 것과 같고, 마을 앞의 나루터가 일(日)자형이라서 두일포라 부르게 되었단다. 여기서는 흔히 ‘들포’라고 부른다.
바닷가 아름다운 데크길
들포회가든을 옆에 끼고 다시 오르막길이다. 하늘에 드문드문 몰려드는 구름이 수상쩍다. 결국 툭 터진 하늘, 또 비다. 이번에는 피할 사이도 없이 다 젖고 말았다. 잠깐이었지만 비를 맞고 보니 의외로 시원해서 좋다. 이렇게 무방비로 비를 맞고도 기분 좋아했던 지가 언제던가.

포장도로를 벗어나 야트막한 산길이다. 비에 젖은 소나무 숲길을 빠져나가자 다시 바다다. 바닷가 양식장 넘어 저기, 지구본 모양을 하고 있는 ‘한반도 동쪽 땅 끝’ 표지석이 보인다. 바쁜 걸음 앞에 철조망이 길을 막고 있다. 사유지라고 푯말도 붙어있다. 주인에게 허락을 받고 가는 길이지만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발길이 조심스럽다.

동쪽 땅 끝에서 바라보는 하늘이 더없이 푸르고, 바다는 고요하다. 동해가 열려 내가 마치 망망대해로 나온 것 같다. 이렇게 수려한 바다를 두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철조망 앞에서 발길을 돌렸을까. 언젠가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두고 발길을 돌린다.
석병리 성혈바위
완만한 곡선의 해안도로다. 화산 폭발의 여파가 여기까지 미친 것일까. 바닷가에는 주상절리의 흔적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어 신비감에 젖어들게 한다.

해안선을 따라 바윗돌이 병풍을 둘러쳐 놓은 것 같아 석병이라 이름 지었다는 석병리, 포구 옆에 성혈바위다. 성혈(性穴)은 선사시대 신앙의식의 하나로 돌의 표면에 파여져 있는 구멍을 말한다. 원형은 태양, 여성의 성기, 알, 구멍 등으로 상징되며, 당시 인구 증가에 따른 생산량 증대의 필요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신기한 이야기를 뒤로하고 강사리 다무포 고래마을로 들어선다. 다무포는 숲만 무성하고 없는 것이 많다는 뜻으로 풍자하여 다무포(多無浦)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래마을은 무슨 근거로 붙여진 이름일까. 주민의 말에 옛날에는 고래가 많았다는 얘기다.
삼정리 관풍대
강사리 앞 바다에 예쁜 고래 떼를 떠올리며 강사 포구를 지나 해안도로가에 작은 카페다. 아이스커피 한잔을 테이크아웃 해서 땀을 식힌다. 이제부터 발밑에 바다를 둔 아름다운 데크길이다. 왼쪽으로는 소나무 숲, 오른쪽으로는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비경이다.

데크길을 내려서자 대보리 호미곶 해국길이 이어지고 있다. 아직은 때가 일러 해국은 피지 않고 붉은 나리꽃과 보라색 순비기꽃이 피어 여름날의 정취를 더해 주고 있다. 구불구불 돌아나가는 해안길에 퓨전화장실 안내판이 새롭다. 외관은 현대식인데 내부는 재래식인 화장실을 가리키고 있다. 살펴보니 아무래도 형태만 갖춰 놓은 것 같다.
영일만 호미곶 일출 불 씨
한반도 동쪽 땅끝 표지석
대보교를 건너 이번 여행의 종착지 호미곶이다. 호미곶은 한반도 지형상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 자리가 천하 명당이라는 이유로 일제강점기엔 이곳에 쇠말뚝을 박아 정기를 끊으려 했으며, 한반도를 호랑이가 아닌 토끼로 둔갑시켜 교육시키기도 했다.

이곳에 자리 잡고 있는 호미곶 등대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 39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등대의
▲ 글·사진 이순화 시인
슬픈 역사를 살펴본다. 1901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러일전쟁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일본의 실습선이 염탐을 위해 대보리 앞바다를 지나가다 암초에 부딪쳐 전원이 익사한 사건이 있었다. 일본이 그 사건의 책임을 고스란히 우리 정부에게 떠넘겼다. 이를 계기로 빚까지 내가며 세운 등대가 푸른 하늘아래 우뚝 솟아 동해를 내다보고 있다.해맞이광장에 안치된 ‘영일만 호미곶 일출 불 씨’ 앞이다. 이 불 씨는 2000년 1월 1일 호미곶 첫 일출 정기를 모아 채화한 것이다. 어둠 속의 한줄기 빛. 내일을 향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남아 있기를.


호미곶 새천년 기념관 옥상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풍경

■여행자를 위한 팁
맛집 추천: 호미곶 등대 뒤쪽에 자리 잡고 있는 등대지기식당으로 15,000원, 18,000원 가격의 슬러시물회가 시원하고 담백해서 좋다. 정갈하게 차려낸 여러 가지 반찬에 따끈한 매운탕까지 덤으로 나온다. 바쁜 와중에도 부족함이 없나, 살펴 주시는 주인의 인심이 엿보이는 집이다.
해파랑길 14코스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 다무포 고래마을로 들어서면, 마을 특판장에서 계절음식으로 내놓은 냉콩국수 (5000원), 우뭇가사리 콩국 (2000원)을 별미로 맛 볼 수 있다. 단 월요일은 휴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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