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파가 오면 손깎지를 끼고 걷자. 손가락 사이마다 배어드는 젖은 나무들, 우리가 가진 노랑을 다해 뒤섞인 가지들이 될 때, 맞붙은 손은 세계의 찢어진 안쪽이 된다. 열매를 깨뜨려 다른 살을 적시면 하나의 나무가 시작된다고. 그건 서로 손금을 겹쳐본 사람들이 같은 꿈속을 여행하는 이유.

길게 뻗은 팔이 서서히 기울면 우리는 겉껍질을 부비며 공기 속으로 퍼지는 여름을 맡지. 나무 사이마다 환하게 떠오르는 진동들. 출렁이는 액과를 열어 무수히 흰 종들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어봐. 잎사귀들이 새로 돋은 앞니로 허공을 깨무는 동안.

(후략)




감상) 여름이 지나가다보다. 그 사이 비파가 왔었던가, 복숭아나 해바라기가 왔었던가, 아무 것도 각인되지 않은 여름이 어느 새 지나가다 보다 아무리 주먹을 꼭 쥐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던 사람, 사랑, 베란다 앞에 세워진 빨랫줄이 텅 빈 오후 그 사이로 소리도 없이 빠져나가는 구름.(시인 최라라)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