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산실 ‘임청각’ 아직 주인없는 건물로···이항증 증손, "석주 선생 ‘위국헌신’ 정신 이어가야"

▲ 석주 이상룡 선생의 증손 이항증씨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 선생이 돌아가신 지도 어느 듯 85년의 세월이 흘렀다.

광복 72주년을 맞아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임청각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대한민국의 현실이다”며 이를 통해 우리의 뼈아픈 역사를 되돌아보길 강조했다.

안동시 법흥동 낙동강변에 위치한 임청각(보물182호)은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년)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한 고성이씨 종택이다.

이 집안이 독립투쟁에 바친 세월을 보면 석주의 아들, 손자 3대에 걸쳐 111년, 동생 이상동의 3부자 116년, 동생 이봉화의 3부자 105년, 종숙 이승화 43년을 합하면 무려 375년이나 된다.

99칸의 대종택은 일제강점기에 행랑채와 부속건물 등 50여 칸이 뜯겨나가 반 토막이 된 지도 75년이 지났다. 일제가 독립운동 성지인 임청각의 정기를 끊으려고 마당으로 중앙선 철길을 뚫은 것이다.

‘일제 잔재 청산’의 의지가 담긴 대통령의 경축사는 그동안 석주 선생의 유지를 받들며 마음 속에 묻고 살아온 후손들의 가슴을 한꺼번에 쓰러 내렸다.

비가 내리는 광복절 오후 임청각에서 만난 이항증(78·석주의 증손)씨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지난 날 들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불켰다.

“우리 7남매 중 위로 네 분은 일제 고문에 죽고, 가문을 망친 종가라고 문중에서 손가락질 받고 자랐어요. 나와 여동생은 대구 보육원에 3년이나 보내졌지요. 형님들은 독립운동 집안이라 중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어요. 돈 없고 아버지 없어 고생 많이 한 조카들이 아직도 눈에 어린 거려요”

이항증 씨는 조카 혼주 석에 8번이나 앉을 정도로 집안 대소사를 챙겨야 했다. 형님 네 분이 일찍이 단명해 모두 자신의 몫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임청각은 지금까지도 주인 없는 건물로 남아있다. 석주 선생이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99칸 규모 생가를 일본인에게 판 뒤 석주 선생 후손이 10년에 걸친 법정 투쟁 끝에 2010년 소유권을 되찾았지만 임청각은 여전히 미등기 상태로 남아 있다.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옛 주인을 찾는 게 후손들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이항증씨는 “집에 도둑이 들면 경찰이 피해 신고를 받는데, 국가에 일본 떼강도가 들어와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갔는데 저항하던 독립투사가 아니더라도 피해신고를 받는 기관이 있어야 당연하다. 그러나 불행이도 없었다”며 10년 넘게 싸워 온 어려운 과정을 회고했다.

이어 “500년 가문과 제자를 이끌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반에 까지 이른 선생에게 관료들이 갑작스레 건국훈장 3등급(1962·독립장)을 추서했다. 이는 후일 동생(이봉희)과 조카(이광민), 손자(이병화)와 같은 등급이 되어, 결과적으로 임시정부 수반에 대한 모욕이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임청각은 임란 때 파병나온 명나라 군사가 주둔했던 곳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때‘선비정신과 호국정신’을 발휘한 역사의 현장이다. 또 전라도 고경명 집안과 사돈 간으로 영호남 명문가가 400여 년 우의를 다져오고 있는 집이다. 2009년 현충시설로 지정됐으며, 현재 마당을 관통한 철로가 옮겨지는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이 씨는 “역사복원 차원에서 복원된다 하더라도 내실없이 외형만 화려한들 무엇하랴?”며 ‘위국헌신’의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도 임청각 안채에는 지난해 5월에는 문 대통령이 의원 시절 방문해 남긴 “충절의 집에서 석주 이상룡 선생의 멸사봉공 애국애족 정신을 새기며, 임청각의 완전한 복원을 다짐합니다”라는 글이 남아 있다.


오종명 기자
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안동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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