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눌지왕의 원을 풀어준 충신 김제상

제상 부인의 망부석

신라 제13대 미추왕 다음에 17대 눌지왕의 원을 풀어준 김제상의 충성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김제상은 삼국사기에 박제상으로 나오기에 통상 박제상으로 불린다.

내물왕 36년(390년)에 왜왕이 신라에 우호를 요청하며 왕자를 보내달라고 하여, 셋째 아들 미해를 왜국에 보냈는데, 왜는 30년간 억류하며 돌려보내지 않았다. 한편 눌지왕 3년(419년)에 고구려 장수왕의 사신이 와서 볼모를 청하므로 아우인 보해를 보냈는데, 역시 고구려도 왕자를 억류하였다.

눌지왕 10년(426년)에 왕이 친히 여러 신하와 나라 안의 여러 호협한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 때, 눈물을 흘리며 두 아우를 만나보고 싶다고 호소하였다. 백관이,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삽라군 태수 제상을 추천하였다. 이에 눌지왕이 제상을 불러서 묻자 그는 두 번 절하고 아뢰었다.

“신이 듣자옵기를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는 욕을 당하고, 임금이 욕을 당하면 그 신하는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일의 어려움과 쉬운 것을 헤아려서 행한다면 이는 충성되지가 못하다 할 것이며, 죽고 사는 것을 생각하여 행한다면 이는 용기가 없다고 할 것이라, 신이 비록 불초하나 명을 받들어 행하겠나이다.”

제상은 명을 받고 바로 변복을 한 다음 고구려로 들어갔다. 보해가 있는 곳으로 가 함께 도망할 날짜를 약속한 다음 먼저 고성의 수구(水口)에 와서 배를 놓고 기다렸다. 약속한 기일이 가까워지자 보해는 병을 빙자하여 며칠 동안 조회에 나가지를 아니하였다. 그러다가 야음을 틈타 도망하여 고성의 바닷가에 이르렀다. 고구려왕이 이 일을 알고 수십 명의 군사를 시켜 뒤쫓게 하였다. 고성까지 따라왔으나, 보해가 평소 고구려의 좌우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군사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모두 화살촉을 뽑고 쏘아서 몸이 상하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다. 눌지왕은 보해를 보자 미해의 생각이 나서 한편으로 기뻐하면서도 미해마저 보기를 소망하였다.

이에 제상은 왜 땅으로 가기 위해 율포의 바닷가에 이르렀다. 그 아내가 이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의 갯가에 이르렀으나 남편은 벌써 배에 올라 있었다. 그 아내가 제상을 간절히 부르자 제상은 다만 손만 흔들어 보일 뿐 배는 멈추지 않았다. 슬픈 이별이었다. 제상은 왜국에 도착하여 거짓말을 하였다.

“계림왕이 아무런 죄도 없이 제 부형을 죽였으므로 도망을 하여 왔습니다.”

왜왕은 이 말을 믿고 제상에게 집을 주어 편안히 거처할 수 있게 하였다. 제상은 늘 미해왕자를 모시고 해변에 나가 놀았다. 그리고 물고기와 새와 짐승을 잡아서 왜왕에게 바쳤다. 왜왕은 기뻐하여 조금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 날 새벽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제상이 차마 혼자 떠나지 못하는 미해를 탈출시키고 태연히 남았다. 늦게 안 왜왕이 기병을 시켜 그 뒤를 쫓게 하였으나 미해는 이미 멀리 간 뒤였다. 왜왕이 제상을 가두어 두고 나서 말했다.

“너는 어찌하여 너희 나라 왕자를 보내었느냐?”
제상이 대답하기를,
“나는 계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오. 나는 단지 우리 임금의 소원을 이루게 했던 것뿐이오. 어찌 이 일을 당신에게 말할 수 있겠소.”
계림의 신하라고 하면 갖은 형벌을 쓸 것이요 왜국의 신하라고 말한다면 후한 녹을 줄 것이라는 왜왕에게 제상은 의연하게 말했다.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차라리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겠다.”
왜왕이 노하여 제상의 발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베어 그 위를 걷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다시 물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
“나는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쇠를 달구어 그 위에 제상을 세워 놓고 말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인가?”
“나는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제상을 굴복시키지 못할 것을 알고 목도라는 섬에서 불에 태워 죽였다. 미해는 바다를 건너오자, 눌지왕은 아우 보해와 더불어 남교에 가서 맞이하였다. 대궐로 맞아 잔치를 베풀고 국내에 대사령을 내리어 죄수를 풀어 주었다. 제상의 아내를 국대부인으로 봉하고 그의 딸로서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았다.

제상이 떠날 때에 제상의 부인이 뒤를 쫓았으나 따라가지 못하고 망덕사 남쪽 모래위에 이르러 거기서 주저앉아 울부짖었는데, 이 일을 따라 이곳을 장사(長沙)라고 한다. 친척 두 사람이 그 부인을 붙들고 집에 돌아오려고 하였을 때 부인이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서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을 벌지지(伐知旨)라 했다. 오래된 뒤에도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마침내 죽었다. 그래서 부인을 치술신모라고 하는데 지금도 그를 제사 지내는 사당이 있다.

이상 김제상(또는 박제상) 부부에 관한 삼국유사의 충성스럽고도 비장한 기록을 요약하였는데, 제상은 인품이 뛰어나고 학식이 섬부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부도지』란 믿기 어려운 상고사(上古史)에 관한 저술이 박제상의 저작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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