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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호 호서대교수 법학박사

국가는 법규범의 성립과 궤를 같이한다. 사람들은 당초에 생명·건강·재산 등에 대한 위험의 방지를 위해 국가 공동체를 수립했다. 하지만 오늘날 국가의 목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국가의 소극목적은 그 정확한 외연을 몰라도 역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계속 확장되어 경제까지 담당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경제는 시장에 맡기라는 요구가 국가의 존립을 배척하는 주장으로 인정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특정 집단의 이해가 아니라 국민의 보편적인 이익을 목적으로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 필요성이 크다. 국내 경제 문제는 그렇다 치자. 그러나 대외경제에 대해서는 국가는 자기 뜻대로 아무런 역할도 수행하지 못한다. 중국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이 이를 대변한다. 주권국가라고 하기에는 우리의 대응이 초라하기 그지없다.

국가가 내부 경제에는 소극적 규제를 해야 함에도 우리 기업들에 대해서 매우 엄격한 태도를 취하는 것과 비교하면 역설적이다. 사실 살충제 계란 파문과 같은 소극적 규제는 위험이 발생하는지 여부에 대한 객관적 사실의 인식문제이다. 물론 위험허용의 한도 문제 이외에 당장의 국가개입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가 국경 내부에서는 위험의 방지라는 소극목적으로 일관하는 것이 민주정치의 과정을 가장 덜 왜곡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국가는 기업에 대한 적극적 규제를 풀고 더 너그러워야 한다. 대신 눈을 밖으로 돌려야 한다.

애당초 국가 또는 헌법은 사람들의 경제활동 내지 경제 질서에 대해 어떤 역할을 맡고 있었는가? 헌법은 19세기의 도식에서 보면 곧 통치기구였다. 독일과 프랑스가 그렇다. 미국의 경우도 연방헌법은 처음에는 통치기구로 출발했다. 제정법은 그 자체가 같은 법역(法域)에 속한 사람들의 정치적 소통의 결과인 동시에 장래의 소통을 제어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집단 간의 의례적 물물교환이나 전쟁에 의한 약탈 이외의 재화의 효용은 개인 및 지역마다 다양하다. 그러므로 당사자 임의에 근거한 재화의 교환은 국법과 국가 자체의 존재나 관할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즉, 교환 혹은 거래는 자연 발생적으로 성립하여 지속되었다. 사람의 자유의사가 국가의 존재를 전제로 하지 않은 이상 상품교환은 국가성립보다도 논리적으로 역사적으로도 앞선 것이다. 마약 거래 등의 지하경제가 법집행기관에 의하여 와해되어도 곧 재건되는 것은 국가가 없어도 시장이 성립할 수 있다는 한 가지 예이다. 이처럼 국가나 제도가 없는 시대와 사회에서도 서로의 신의성실은 작동했다. 이것은 단순한 선의가 아니고 당사자 쌍방의 이익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다. 여기서 비로소 시장과 합리적 기대가 생겨났다.

그렇다면 우리가 중국의 힘의 논리에 대처하는 계략은 어떤 것이 있을까? 국경을 넘는 자본에 대응한 조치는 조국이 없는 노동자라는 구도로는 필패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중국 스스로도 이런 정치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세계 경제 질서를 빈곤, 억압, 예속, 타락, 착취가 갈수록 커지고 노동자가 프롤레타리아로 전가되는 과정이 나타난다고 보고 만방(萬邦)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고 주문할까? 물론 시대착오적 망발이다. 세계란 그 본디의 뜻(原意)에서 본다면 성원으로서 소속 국가는 물론 특정 민족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중간에는 이제 적절한 경제 거버넌스의 구상이 논의되어야 한다.

어쨌든 한·중 경제는 이대로 진전하면 그 앞에는 우리가 죽은 후의 홍수 상태나 불편한 진실의 파멸적 시나리오만 상정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의 인류 보편의 원리인 우리 헌법체제에서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한·중 경제 질서를 도출할 필요가 있다. 국가는 자의적으로 셰퍼드(수호자)에서 늑대(강탈자)로 변신해서는 안정적인 신뢰를 얻을 수 없다. 그러니 셰퍼드 그대로 있는 것이 최선이다. 중국이 사드를 구실삼아 늑대로 돌변한 것은 국가이익과는 관계없는 자가당착의 논리요 지도자의 체면에서 비롯된 것 그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논리로 중국을 설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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