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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병일 영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우리나라와 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면서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땅이다. 땅은 우리가 딛고 살아가고 있는 토지를 말한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토지를 개인소유로 하고 있고, 특히 좁은 국토를 가진 우리나라에서는 개인의 부의 척도로 인정되는 땅을 한 평이라도 더 가지기 위해서 모두가 열심히 노력을 한다.

토지에 대한 우리 민족의 집착은 매우 강인하다. 토지는 지적도와 등기부에 의해서 개별화되어 개인소유권의 대상이 되고 있다. 종래까지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개인소유가 인정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학계에서 발굴하고 연구한 결과를 보면, 조선 시대에도 토지의 개인소유가 인정되었고, 토지를 거래한 흔적이 제법 남아 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 토지 거래는 활발하였고, 토지에 관한 소송이나 거래 등에 관련된 소지, 문기, 입안 등 관련 문서들이 많이 만들어진 것 같다. 이들 문서들이 집안 대대로 보관되어 오다가 최근에 이르러 봉산동이나 인사동 고문서 시장에 나오고 있다.

근래 이들 문서를 검토한 연구를 살펴보면, 조선 후기에는 농지나 임야에 관한 거래나 소유권분쟁이 많았고, 이를 통해서 토지의 개인소유권은 그 당시부터 인정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양안 제도에 의해서 토지 지적이 관리되었지만, 지금처럼 분명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지적은 일제가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를 침략한 이후 1912년부터 실시한 토지조사사업과 1918년부터 실시한 임야조사사업에 의해서 도입되었다. 그러나 사업 시작 전후로 일부 지역에서 미리 실시하거나 증명과 등기가 병행 시행되는 등 치밀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일제는 사업의 실시 목적을 근대적 토지소유권제도를 확립하기 위해서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웠고, 사업의 결과로서 사정을 하였는데, 그 사정의 법적 성질을 원시취득이라고 강변하였다.

이미 조선 시대부터 확립되어 있었던 토지의 소유권을 일제가 어떻게 최초로 다시 부여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서 소유권을 근대법적으로 인정하는 법인화한 것이라고 한다. 사실 일제로서는 우리나라 침략에 필요한 재원을 우리나라에서 조달하기 위해서 지적제도를 도입하였고, 토지세를 확실하게 거두기 위해서 조사사업을 하였던 것이다. 조사사업은 신고제로 하였는데, 그 당시 홍보 등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신고를 하면 토지를 빼앗긴다고 하는 소문 등으로 신고를 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개인이나 동네 마을 소유이면서 신고를 하지 않은 토지는 모두 일제 소유로 국유화되었다.

결국, 일제가 조사사업에서 근대적 소유권 도입 운운하는 것은 미명(美名)에 지나지 않고, 사실상 지세를 인상하거나 토지 소유를 왜곡하면서 경제 수탈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다른 한편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북한에서는 1946년 1월 토지개혁으로 등기제도를 폐지하고 토지대장을 모두 회수하여 개인소유권을 폐기하였다. 그 후 6·25 전쟁 전후 북한에서 내려온 이산가족, 실향민이나 그 유족들이 그 당시 가져왔던 북한에 있는 토지의 등기부나 대장 등 문서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고, 심지어 현행 법령상 아무런 가치도 없을 수도 있는 그 문서를 사고파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최근 ‘민원 24’를 통한 조상 땅찾기가 유행하고, 이로 인한 소송이 빈발하고 있다. 특히 조사사업 당시 토지에 관한 증명과 등기의 선후 등 지적에 관한 소송에서, 문서의 실체적 진실 발견을 둘러싸고 논란도 있다. 100여 년 전에 도입된 지적과 등기를 지금도 사용하고 있고, 북한의 토지문서는 모두 폐기된 상황에서, 남북통일을 앞두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동안 일어난 지적 관련 내용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적 재조사사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적 유물로 남겨진 조선 시대 문서연구는 사학계에 맡겨 놓더라도, 현행 법령화 논란이 되고 있는 일제하 토지 및 임야조사사업과 그에 관련된 문서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이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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