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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호 호서대교수·법학박사
정치가가 자신의 시대를 변화시키고, 자신의 신민(臣民)을 새로운 목표를 향해 이끌어 가기를 원한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시대를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나 한 나라의 정치질서의 변혁은 그 나라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특별히 발전된 상태에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정치질서와 사회적 변혁의 추진력 사이에 심각한 모순이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칙이다. 통치하고 있던 왕을 퇴위시킨 것만으로는 기존 상황을 크게 변화시키지 못한다.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가장 나쁜 적은 그 발꿈치에 매달려 있는 모험적인 요소이다. 문재인 정부가 촛불 혁명의 승리와 연결될 수 있으리라 믿는 많은 정책이 국민의 보편적인 믿음에 역행하고 있다. 기껏 수행하는 작업들이 좌파인물들로 사회 곳곳을 도배하는 것들뿐이다. 확실히 공감이 가는 정책구상도 없지만, 민주적이라는 포장지로 감싼 정책마저도 탈원전에서 보듯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대단히 유치하다. 촛불 혁명의 승리가 소위 있는 집사람들의 응접실 소파와 피아노를 부숴버릴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했다면 그 혁명은 대체로 승리할 수 없다.

19세기 영국노동당이 내걸었던 기치를 보라. ‘인민에게 땅을, 각자에게 자신의 집을, 모든 사람에게 선거권을 그리고 총’이었다. 이것은 영국의 민주주의 전통을 힘 있게 요약해 놓은 문구이지만 사실 경제와 사회의 구체적 실상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당 강령이 아니라 시위대의 구호나 다름없었다. 우리의 촛불 투쟁의 실천은 계급 간의 차이를 보다 더 명확히 끌어내지 못하고 실패한 혁명으로 남게 될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삼부회 소집에 버금가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오직 대통령만 바꾼 미완의 혁명 서곡으로 그칠 것이다. 보편적인 국민의 자유와 촛불을 든 시민들의 민주주의 사이에는 명백한 정치적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기업정책이나 복지정책은 말할 것도 없고 안보정책마저도 자유경쟁이 악의 지양(止揚)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민족 간의 대립을 더욱 첨예화시키는 것도 경쟁이니 북한과 협약을 맺어 경쟁을 하지 말자고 제안한다. 이것이 인류의 근본악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오직 경쟁만이 인류역사의 진보를 가능하게 한 추동력이었다. 무릇 모든 생명체는 생존을 위해 경쟁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자유경쟁 및 그와 관련된 개인과 국가의 경쟁은 역사의 발전법칙이었다. 고대 아테네와 코린트 사이 그리고 로마와 카르타고의 대립, 중세 제노바와 베네치아 그리고 한자동맹 도시와 네덜란드의 경쟁에서 추동을 읽을 수 있다. 경쟁은 보다 높은 도덕적 삶의 형태에 도달하기 위하여 인류가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유전현상이다. 사유재산과 이기주의에 대항하는 옛 유토피아적 비판으로는 아무것도 해결 못 한다.

지금은 아버지의 방식대로 일하고 피로가 쌓이면 자러 가는 중세시대 길드(Guild) 방식으로 기업과 국가를 운영할 수 없다.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새로운 시대의 소름 끼치는 격동에 대한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 한 손에 촛불을 들고 남아 있는 다른 손을 잡은 사람들의 소망만을 바라보고 가지 말라. 반혁명의 타격이 유희에서 깨울 때까지 그 꿈에 도취해 있을 것인가? 환상과 허망한 실험 욕구만으로 국제무역, 팽창주의, 세계자본, 군사대국주의를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이전 시대의 모든 업적을 무색하게 하는 인공지능 기술과 돈의 힘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삶의 희망을 뿌리째 상실한 소시민들의 억눌린 증오에서 혁명을 하고 민족을 구제할 수 있다고 믿는가? 인간의 이기주의와 자유경쟁의 악에 대해 한탄하며 자신의 억눌렸던 과거에 대한 보상을 위해 적폐(積弊)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짓뭉개면 그들에게 돌아갈 보상은 자신들의 뿌리를 뒤흔들 보복의 고통뿐이다. 모든 위기는 과거에 있지 않다. 미래를 읽고 준비하고 대응하지 못한 것이 악이다. 마르크스류의 소아적 환상과 후진성으로부터 해방하라. 그리하여 김정은의 파멸과 멸망이 필연임을 확신하고 진정한 힘의 우위에 의한 통일 준비하라. 이것이 민주주의 촛불 혁명의 최후 승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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