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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 50년] 1. 대한민국의 꿈 일관제철소 왜 포항인가?

일관제철소 포항 건설, 조선시대 이미 예견 되었다

이한웅 논픽션·탐사기록 작가   |   등록일 2018.01.01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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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12월 당시 건교부에 파견 군무원 문순화씨가 대통령에게 입지후보지 보고를 위해 세스나 경비행기를 타고 포항상공에서 찍은 사진. 포항시가지 너머 형산강 건너 제철소 부지가 보인다. 포항시청 이광희씨 제공

1968년 4월1일 오전9시30분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 3층에서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의 창립기념식이 열렸다. 꼭 두 달 전 떠들썩하게 열린 경부고속도로 착공식과는 달리 초대사장 박태준과 창업요원 39명만 참석한 채 요란하지 않은 조촐한 행사였다.

곧장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의 나무현판이 유네스코회관 1층 외벽에 내걸렸고 50일가량 지난 5월20일, 포항 영일만 모래 벌에 제철소건설 현장지휘통제소 ‘롬멜하우스’가 지어졌다. 꼭 반세기전, 경부고속도로와 함께 대한민국 歷史를 바꾼 大役事, 포항제철소 건설은 그렇게 포항과 운명의 인연에 동승했다. 종합제철소가 포항의 품에 안길 때까지는 낙타가 바늘을 통과해야할 정도의 많은 사연과 우여곡절이 있었다.한국 철강산업 발전의 꿈 종합제철소건설의 꿈은 1968년4월1일로부터 한참 거슬러 올라간 1958년부터 싹 트기 시작했다.

우리나라가 동네 대장간이나 가내수공업 형태가 아닌 ‘제철소’에서 철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일제 강점기였다. 1918년 황해도 송림시에는 일본의 미쓰비시 제철이 ‘겸이포 제철소’를 건설하고 함경북도 청진에도 제철소가 있었지만 철강산업 자체가 일제 군수공업의 일부였기 때문에 제철소에선 주로 선철을 생산했으며 모조리 일본으로 실려갔다. 그렇게 수십년이 지난 후 광복이 되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으로 그나마 있던 산업시설도 잿더미가 되었다. 폐허 속에서도 철강으로 다시 재기의 몸부림을 시작한 것은 북한이 먼저 였다.일본인들이 지었던 제철소를 다시 가동했고 황해제철소, 4.13 제철소 등이 건설돼 전쟁후 북한 경제를 돌리기 시작했다.

남한도 ‘산업의 쌀’ 철강산업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지만 유일한 제철소였던 강원도 삼척의 ‘삼화제철소’의 운영이 만만치 않았다.

삼화제철소는 보수를 거쳐 1954년부터 가동을 시작했지만 원료와 기술부족, 그리고 자금난으로 3개월도 못 넘기고 1957년까지 휴업하게 된다.

인천에도 제철소가 있었지만 이승만 정권은 삼화제철소가 있는 동해안 지역을 주목하고 그 일대에 <종합제철공업단지>를 지을 계획을 세운다. 1958년 8월 상공부는 강원도 양양 지역을 주요 입지로 한, 연간 선철 생산 20만톤 규모의 종합제철 건설계획을 밝혔다.

<포스코 35년사>에 따르면 “이 계획은 ICA(국제협력기금) 자금 3000만 달러, 내자 150억환으로 1965년까지 선철 20만 톤 생산 규모의 시설을 건설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계획은 10월 4일 상공부 산하 철강자문위원회가 정부에 건의함으 로써 재확인되었는데, 외자 3475만 달러, 내자 248억3500만환으로 1965년까지 대한중공업공사가 맡아 건설하되 제철 방식은 고로용광법과 직접환원제철법(RN법)을 병용하고 제강 방식은 LD(Linz-Donawitz) 방식으로 한다는 등 구체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야심찬 계획은 외자유치 실패와 정부 부처간 미숙한 일 처리 등으로 물거품이 되고 1960년대초부터 다시 종합제철 건설계획이 구체화 되었다. 비록 자본, 기술, 경험도 없는 전무(全無)의 상태에서 일관제철소 건설의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1961년 민주당 정부도 동해안 일대에 제철소 건설계획을 세우지만 정권자체가 단명으로 불발에 그치고 이후 등장한 박정희정권 역시 어딘가에 지어질 종합제철소 건설입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피츠버그 공업지대를 찾아가 미국의 제철소 건설기술 용역社인 코퍼스(Koppers Co)의 포이 회장을 만나 외자조달을 위해 국제 제철차관단 구성을 제의하면서 ‘그 구상’은 급물살을 탔다. 1966년12월 대한 국제제철차관단(KISA)이 발족되자마자 ‘제철소 입지선정’ 문제는 한반도를 뒤흔들 만한 이슈가 됐다.

철광석을 수입해 올 것이라면 우선 필요한 것이 항구였다. 항구라는 이름이 앞에 붙는 도시 상당수가 후보에 포함됐고 곧장 격렬한 유치운동을 벌였다. 동해안의 삼척, 묵호, 속초, 월포, 포항, 울산과 남해안의 부산, 진해, 마산, 삼천포, 여수, 보성, 목포 그리고 서해안에 있는 군산, 장항. 비인, 아산, 인천 등 모두 18개 지역이 후보군에 올랐다.

정부는 제대로 된 후보지를 선정하기 위해 제철 선진국인 일본과 미국에 자문을 구해 조사단을 요청했다. 1965년 내한한 일본 조사단은 울산 염포리와 삼천포, 마산을 물망에 올렸고 1967년 내한한 미국 코퍼스사의 기술진은 삼천포와 울산을 가장 유력 후보지로 추천했다. 결국 삼천포가 건설지로 유력하게 떠올랐고 포항은 후보군에서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외국 조사단의 평가와는 별도로 후보 도시들은 제철소 유치의 꿈에 부풀어 각 지역별로 대규모 유치운동이 전개됐고 이 가운데 당시 포항과 인근 영일군을 합쳐도 7만명을 겨우 넘는 작은 도시 ‘포항’도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

현재 포항상공에서 찍은 포항시가지.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포항시가지와 포스코가 들어서 있다. 촬영= 이한웅

왜 포항인가? 막판 뒤집기_제강능력 확대

일본과 미국 조사단의 추천과 건설에 따른 부대시설 비용이 가장 적게 드는 삼천포로의 ‘낙점’이 확실시 되던 제철소 건설입지는 막판에 포항으로 돌아섰다.

정부는 1967년6월30일 종합제철 입지를 ‘포항’으로 결정 한 후 7월7일에 공식적으로 발표했다.선진국들의 입지 조사 결과에서도 포항은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던 포항이 최종입지로 발표되자 모두가 놀랐다.

제철선진국들이 삼천포와 타 지역을 추천했고 마침 1967년 6.8 국회의원 선거 바람을 타고 정치인들이 입김이 거세어져 제철소 부지를 둘러싼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충남 비인지구는 당시 실세였던 김종필의장의 연고지였고, 울산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고향이었으며, 삼천포는 박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이자 경제계의 거물 서모씨의 연고지 였고 각 선거구 마다 힘 있는 후보자들이 제철소 유치를 자신했지만 ‘포항’을 미는 힘은 보이지 않았다. 포항이 막판 예상을 뒤엎고 선정된 결정적 이유는 정부의 조강생산량 기본방침의 변경이었다.

정부는 한 번 더 깊은 고민을 했다.

당초 연산 50만톤 또는 100만톤 규모로 추진하던 조강생산능력을 미래지향적으로 300만톤으로 하는 내용으로 기본방침을 바꿨다. 그래서 1967년 5월, 연간 300만톤 규모의 종합제철소를 만들 수 있는 지역으로 월포, 삼천포, 울산, 보성외에 포항을 포함시킨 후 집중 대상 지역으로 선정하고 현지 조사에 나섰고 용역을 맡은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는 부지면적, 공업용수, 안벽길이, 전력과 같은 필수 조건을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6월말 최종 보고서를 제출했다.

50~100만톤 규모일 때는 삼천포가 단연 유리하지만 조강생산량을 확대하면 부지 300만평, 공업용수 25만톤,8만톤이상 선박이 접안 가능한 포항이 가장 적합한 입지였던 것이다. 이는 입지선정 막바지에 유엔개발기구(UNDP)등 전문가그룹이 그간 기술조사결과 시설규모를 처음부터 확대해서 착공해야 한다는 조언을 정부가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항은 정치적인 입김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경제성과 미래지향성만으로 엄격히 평가받아 당당히 제철소 입지로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되었다.

이 밖에 포항이 선정된 것은 부지가 넉넉했고 제철소 부지로 선정한 2.5km에 이르는 해안일대 지역은 동쪽인 바다를 제외한 3면의 육지가 영일만을 감싸면서 동해의 강한 풍랑을 막고 있어 천혜의 항구를 이루고 있었다. 또 교통의 경우 경부고속도로가 이곳에서 36km 떨어진 경주를 통과하고 있었으며, 2개의 국도와 6개의 지방도가 있어 해안 교통이 유리하고, 해상으로도 부산·울산·묵호·삼척 등을 연결하는 중심지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50년전, 포항제철소는 영일만 모래벌에 파일을 박으며 포항시민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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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웅 논픽션·탐사기록 작가

□ 이한웅 논픽션·탐사기록 작가

작가는 경북일보경제부장, 선린의료원 홍보팀장, 포항시축제위원회 사무국장등을 거쳐 현재 ‘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를 맡고 있는 논픽션, 탐사기록 전문 작가다. 저서로 칼럼집 ‘포항이 촌구석이라구요’ ‘포항KBS50년사’ ‘영암추모집’ ‘제일연마 50년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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