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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모 서울취재본부장
이 나라 외치(外治)는 구한국 시대와 유사하다. 

중앙집권적 정치는 지방의 활력을 죽였다. 균형발전에도 실패했다. 지금 한국의 부(富)는 경상북도 면적보다 훨씬 작은 수도권에 몰려있다. 우리나라에는 두 국민이 있다. 잘사는 수도권 지방주민과 못 사는 비수도권 지방주민. 통계청이 발표한 ‘2016년 지역 소득(잠정)’에 따르면 대구의 경제성장률은 16개 시·도 중 유일하게 마이너스 성장률(-0.1%)이다. 대구의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이 2천14만8천 원으로 울산(6천95만6천 원)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지방도 더 잘사는 지방주민과 더 못 사는 지방주민으로 나눠질 판이다. 민주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난 ‘변종(變種)’이다. 가짜 민주주의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방분권은 쉬운 말로 중앙정부가 나눠주는 것만 받아먹는 것에서 나누는 것 자체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귀족화하고 부패한 중앙 정치세력은 기득권이다. 이제 지방을 2등 국민으로 치부하는 중앙의 묵은 ‘갑질’과 싸워야 한다. 자유와 권리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빅토리아시대에도 노동자 빈민들이 차티스트운동을 통해 권리를 쟁취했다. 이제 존 로크가 제창한 ‘저항권’이 비수도권 지방주민들이 다시 높이 들어야 할 횃불이다.

정부 정책에도 우려 섞인 시선이다. 41.1% 득표율로 당선된 문재인 정권이 야당과도 비타협적이다. 공무원 숫자를 늘리려는 것은 공무원사회의 업무량이 한국 전체 노동자의 업무량 평균치보다 적다는 것을 모른다는 소리다. 최저임금인상도 그렇다. 소기업의 이윤구조를 개선 한 후 최저임금을 올려야 한다. 일머리를 모르는 것 같다. 공론(公論)과 정론(正論)에 귀 기울이지 않는 포퓰리즘 정책은 난정(亂政)이다. 다수가 전제하는 비(非)민주주의다. 

1990년대 말 이후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사교육에 허리가 휜다. 공공의료가 빈곤해 병 걸리면 살림이 거덜 난다. 이를 해결해야 할 한국의 정치는 2000년대 중반 이후 정당 간 비타협적인 양극화 노선으로 대결만 해왔다. 백년대계의 정치는커녕 당쟁으로 날을 지새운다. 국민도 정파와 당파의 편견적인 주장을 쉽게 수용한다. 좌파와 우파는 서로 벽을 보고 얘기하는 것 같다. 한국은 두 개의 도덕적 마당(場)에서 산다. 마치 낮 없는 밤과 같고, 밤 없는 낮과 같다. 낮은 밤이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자유한국당에게 고(告)한다. 지금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가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데 대안적 정책 하나 추진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본인들도 확신하지 못하는 우파 이념에 갇혀있다. 기업들이 압제자가 될까 봐 해외로 탈출하고 있어도 우파는 짐짓 모르는 듯이 한가하다. 미국은 “성공을 처벌하지 마라, 실패를 보상하지 마라”며 ‘티파티’라도 생겼다. 독일 사민당이, 스웨덴 사민당이 지상 최고의 정치로 국민을 행복의 방석에 앉히고 있는 것에 대해 공부도 하지 않는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지성인으로 알려진 저명한 경제학자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에게 처방책을 물었다. “공공원리가 시장을 제어하는 건강한 자본주의 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는 간결한 답을 했다.

이를 위해서는 민주적 시민의식에 기댈 수밖에 없다. “나는 정치에 관심 없다”라는 말을 하는 이가 꽤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이라고 했다. 신이거나 금수가 아닌 이상 정치(폴리스)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 불멸의 진리다. 

이번 전국동시지방선거에 혹시 이런 인물 있으면 주목하자. 북아메리카 300만의 시민의식을 일깨운 사람 페트릭 헨리다. 1775년 민중대회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연설로 영국 본국과의 항전(抗戰)을 주장했다. 한국의 문제는 민주주의 정치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 다시 민주주의다. ‘자유 의지(意志)’로 다진 시민 정신이 민주주의의 추동력이다.
김정모 서울취재본부장
김정모 기자 kjm@kyongbuk.com

서울취재본부장으로 대통령실, 국회, 정당, 경제계, 중앙부처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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