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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100. 괴산 암서재(巖棲齋)

자연과 사람이 빚은 선경에서 ‘성리학 성지’를 꿈꾸다

김동완 여행작가   |   등록일 2018.01.18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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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계곡 바위 위에 우뚝 선 암서재
충북 괴산군 청천리 화양계곡은 바위가 주인이다. 하늘을 찌르는 기암과 세월이 층층이 쌓은 바위가 절벽을 이뤄 선경을 빚어낸다. 이곳에서 물과 나무는 바위의 조연이다. 청화산(988m)에서 발원한 화양천은 그 일대의 도명산 낙영산 가령산 조봉산을 구획하며 세울 바위는 세우고 엎드릴 바위는 엎드리게 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계곡에는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바위들이 물속에 발을 담궜고 산이 끝나는 곳에는 어김없이 절벽이 우뚝 서서 화양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한다.
화양구곡은 송시열이 노니던 9가지의 경승지이다.
화양구고중 2곡인 운영담
화양계곡의 하이라이트는 화양구곡이 있는 3km 구간이다. 주자의 무이구곡을 롤 모델로 한 조선의 대표적인 구곡 중 하나다. 대한민국 명승 제110호로 지정될 정도로 빼어난 경관이 자랑이다. 화양구곡은 화양천의 하류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며 지정됐다. 1곡은 경천벽(擎天壁)이다. 층층 암석이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형상의 절벽이다. 화양동문이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2곡은 운영담(雲影潭). 주자의 시 ‘관서유감’중 ‘하늘빛과 구름이 함께 서성인다(天光雲影共徘徊)’라는 구절에서 빌려왔다. 3곡 읍궁암(泣弓巖)이다. 널직한 바위다. 효종의 사부였던 송시열은 효종의 제사 일에 이곳에서 엎드려서 울었다고 한다. 4곡은 금사담(金砂潭)이다. 맑은 물 속에 보이는 모래가 금싸라기처럼 깨끗하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5곡은 첨성대(瞻星臺)이다. 송시열이 천문관측을 하기 위해 올랐다는 바위다. 강의 남쪽 낙양산 기슭에 바위가 층층이 포개져 대를 이루고 있다. 황하의 물길이 만 갈래로 갈라져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의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선조의 어필이 새겨져 있다. 능운대(凌雲臺)는 6곡이다. 7곡은 와룡암(臥龍巖), 8곡은 학소대(鶴巢臺)이고 9곡은 파곶(巴串)이다.
암서재에서 바라본 화양계곡. 정면에 보이는 바위가 첨성대이다.
암서재 바로 아래 있는 화양구곡 중 4곡 금사담
암서재는 4곡 금사담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세워졌다. 말 그대로 바위에 깃든 서재이다. 금사담 위 암서재 앞 바위에는 ‘금사담’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금사담 동북쪽 바위에는 ‘충효절의’ ‘창오운단 무이산공’ ‘대명천지 숭정일월’ 같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암서재는 소박하다. 목조기와에 방 2칸 마루 1칸의 세 칸 건물이다. 송시열은 이 집을 암재라 했다. 송시열이 사약을 받고 죽은 뒤 돌보는 사람이 없어 허물어졌다. 김진옥이 송시열 사후 26년인 1715년(숙종 41)에 중건하고 다시 6년이 지나 송시열의 제자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 1641~1721)가 ‘암서제’라고 이름을 붙였다. 권상하는 송시열이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을 때 자리를 지켰고 화양동에서의 송시열의 발자취를 모아 ‘화양구곡’의 이름을 지었다. 또 송시열의 유언을 받들어 만동묘를 조성하기도 했다.

그의 암서재 중수기는 당시 풍광을 잘 담고 있다. “석대 아래로는 깊은 못이 있어서 뗏목은 물론 자그마한 배로 띄울 만하다. 때때로 한 조각 작은 배를 띄우고 물살을 따라 오르락 내리락 하다 보면 밑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물이 맑아서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를 하나 둘 셀 수 있다. 밤에 서재 창가에 기대어 있자면 달빛이 대낮처럼 환하고 영롱하게 세상을 비추고 있어 마치 수정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이때 우암 선생이 지팡이를 끌고 시를 읊으면 금석이 내는 소리처럼 울려 퍼져서, 문득 세상 바깥에 서 있는 듯한 생각이 들곤 했다. 주자가 무이산에 세운 무이정사의 맑은 정취와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암서재 입구. 바위를 깨고 계단을 만들었다.
송시열이 이곳에 암서재를 지은 때는 60살이 되던 1666년 8월이다. 노론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1659년 1차 예송논쟁(기해예송)에서 승리한 뒤 남인들을 정계에서 대거 축출한 뒤 정권을 독점했다. 그러나 효종이 죽으면서 송시열의 입지는 좁아 들었다. 효종의 스승으로 국상의 자문을 맡은 송시열은 장례를 치르는 동안 엉성하기 그지 없는 일로 남인의 공격을 받는다. 관이 시신보다 작아 관을 뜯고 나무를 덧대는 궁여지책을 동원했다. 윤선도가 맹렬히 공격했다. 효종의 장지는 당대 최고의 풍수 이론가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 ~ 1671)가 정했다. 윤선도는 수원부 청사 뒤 산등성이를 명당으로 지목했고 다른 지관들도 모두 길지라며 찬성의 뜻을 밝혔다. 송시열은 이곳을 장지로 할 경우 수원부를 옮겨야 하고 군사들과 백성들의 고통이 클 것이라며 반대했다. 이곳은 나중에 사도세자의 능이 들어선다.

세월이 흐르자 효종의 장지가 잘못 정해졌다며 송시열을 탄핵하는 상소가 잇따른다. 결국 낙향해 소제동으로 돌아왔다가 화양동에 암서재를 짓고 2년간 칩거했다. 그는 1674년 승하한 현종의 지문을 써달라는 숙종의 명을 수차례 거부하다가 포항 장기와 거제도에 유배됐다.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친 위리안치였다. 이후 청풍에 이배(移配)됐다가 1680년에 다시 화양동으로 돌아왔다. 그 후 영중추부사 봉조하 등의 벼슬에 올라 화양동을 떠났다가 1688년을 끝으로 다시는 화양동에 돌아오지 못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완전히 실권을 한 뒤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암서재는 집을 짓고 살기에는 적당한 장소가 아니다. 우선 강을 건너야 하는데 배를 타야 했고 가파른 바위를 힘겹게 올라야 한다.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나거나 눈이라도 와서 쌓이면 통행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경치는 숨이 막히도록 아름답다. 발아래 펼쳐진 강에는 기암괴석이 즐비하고 정면에는 낙영산 중턱에 우뚝 선 첨성대가 눈에 들어온다. 송시열은 첨성대에 올라 천문지리를 관찰하거나 화양구곡을 거닐며 시를 읊었다.

송시열이 효종의 기일에 활처럼 엎드려 울었다는 읍궁암
시냇가 바위벽을 열어

그 사이에 집 한 칸을 지었다.

고요히 앉아 경전의 뜻을 배우며

시간을 아껴 높은 곳에 오르노라

- 송시열의 시 ‘화양동 바위 위의 정사에서 짓다’



송시열은 효종의 기일에 암서재 아래 바위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 그 바위가 읍궁암이다. 대궐을 향하여 활처럼 엎드려 울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옛날 중국 형호에서 황제가 죽자 신하들이 황제가 남긴 활을 잡고 울었다는 고사에서 빌려온 것’(이종묵의 ‘조선의 문화공간’)이라고도 한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000번 정도 거론될 정도로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다. 조선의 유학자 중에서 유일하게 공자나 맹자, 주자와 같은 반열인 ‘송자’로 추앙을 받았다. 중국의 명나라가 망하고 오랑캐라고 여기는 청나라가 들어선 마당에 주자학의 적통은 조선이 이어받았고 그 중심에 서인과 송시열이 있었다. 그는 평생 주자학을 수호하는 것으로 정권을 쥐고 흔들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예학으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예의를 바탕으로 역할을 수행하고 지켜 감으로서 나라의 근본을 잡아야 한다고 믿었다.
암서재는 방2칸 마루 1칸의 소박한 목조기와 구조다.
그는 지나쳤다. 과유불급이다. 주자의 절대적 권위에 기대어 자신과 다른 학설을 주장하거나 주자의 경전을 다르게 해석하는 선비들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사정없이 탄압했다. 그는 공포정치를 펼쳤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개혁으로 바꾸어 가는 대신 보수주의를 공고히 다져 시대의 흐름을 거꾸로 돌렸다. 대동법을 둘러싸고 같은 서인 끼리 한당과 산당으로 갈라졌고, 제자인 윤증과는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의 묘지명을 써주는 문제로 갈등을 빚어 노론과 소론으로 패가 갈렸다.

송시열에 의해 죽음을 당한 대표적인 인물이 ‘회니시비(懷尼是非)’로 유명한 백호(白湖) 윤휴(1617~1680)다. 송시열보다 10살 연하였던 윤휴는 주자만이 세상의 모든 진리라는 송시열
김동완 여행작가-정자.jpg
▲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에 맞섰다. 주자를 제치고 공자와 맹자를 읽고 “천하의 이치란 한 사람이 모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경전해석을 내놓았다. 경신환국이 일어난 1680년 5월 20일 서인이 정권을 다시 잡았다. 송시열은 윤휴를 사사했다. 64세였다. 윤휴는 죽으면서 마지막 말을 글로 남기려 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러자 “뜻이 다르면 쓰지 않으면 그만이지 죽일 것 까지 없지 않은가”라는 말을 남기고 약사발을 마셨다. 9년 뒤 1689년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한 기사환국으로 송시열도 사약을 받았다.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 난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는데 반대하다가 제주도에 유배를 갔다.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83세 때다. 송시열의 흔적은 암서재 외에도 논산의 팔괘정 임이정 남간정사 우암고택 등이 있다.


<독자 여러분의 사랑을 받아 온 ‘정자’ 연재를 100회 ‘암서재’를 끝으로 마감합니다. 그간 애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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