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사는 저에게는 네 개의 바다가 있습니다. 제주, 마산, 부산, 포항의 바다가 그것입니다. 저는 제주도의 한 궁벽한 어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청소년기 때는 마산에서 몇 년간 살면서 학교를 다녔고 부산에도 자주 왕래했습니다. 포항은 성인이 된 이후에 이런저런 인연으로 자주 찾는 곳입니다. 이 네 곳의 바다를 보고 다시 대구로 돌아올 때 늘 느끼는 게 있습니다. “바다가 있어야 비로소 도시가 모양이 난다”는 소감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 번은, 대구에서 태어나 평생을 대구에서 살고 있는 아내에게 슬쩍 제 느낌을 피력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때?”라고요. 그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맞아, 맞아”라고 공감하는 거였습니다. 바닷가 태생이 아니더라도 바다가 주는 그 평형수와 같은 느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는 특히 산비탈까지 올라가 있는 바닷가 도시들의 아기자기한 집들이 보기에 좋았다고 덧붙였습니다. 저는 거기다가 대양(大洋) 위의 해와 달과 별들이 육지의 그것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말을 보탰습니다. “그래?”, 아내는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대양은 그 자체로도 지구의 평형수이지만, 모든 생명체에게 삶의 균형감을 되찾게 해 주는 심리적 치유의 공간입니다. 깊고 넓은 어머니의 품일 때도 그렇고,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이라는 노래가사처럼 ‘찢어지는 아픔’의 대명사일 때도 그렇습니다. 몇 년 전 가수 정재은이 부른 ‘연락선’(반야월 작사, 고봉산 작곡)이라는 노래를 듣고 크게 마음이 요동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노래의 두 번째 소절에 “낯설은 타향 항구에 해도 저문 데 떠나야 할 밤배는 고동을 울리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엄마 잃고 타향을 떠도는 어린 자아의 처량감(청승기)이 최고조에 달하는 부분입니다. ‘낯선 타향 항구’는 이중의 페이소스(비극적 감정)가 깃든 공간입니다. ‘타향’ 인 데다 ‘항구’이기까지 합니다. 낯선 곳인데 또 다른 낯선 곳으로 ‘떠나는 곳’입니다. 장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때도 ‘해 저물 무렵’입니다. 해는 저물어 앞이 캄캄합니다. 그런 시공간에 놓인 어린 주체의 고립감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닙니다. 딱 제가 청소년기 마산에 살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합포만을 바라보며 되씹어야 했던 느낌이었습니다. 반복적으로 그 노래를 들으며 흥얼거렸습니다. 그랬더니 문득 바다가 그리워졌습니다.
살다 보면 까닭 없이 ‘낯선 타향 항구’에 버려진 고립된 주체의 입장이 될 때가 한 번씩 있습니다. 갑자기 ‘우주에 내던져진 먼지 한 톨’과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 바다를 찾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으로 여깁니다. 바다가 단순히 ‘물이 모인 곳’이 아니라는 것을 그 앞이나 위에서 느껴보는 것도 크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다는 이미 ‘오래된 영혼’이라는 것, 그 장엄에 대한 경험은 인류의 집단 무의식 속에서 면면히 계승되어 온 것이라는 것을 몸으로 직접 느껴보시길 권합니다. 우리 인간들, 그 ‘낯선 타향 항구’들을 하나의 생명집단으로 이어주는 어머니의 탯줄과 같은 것이 바로 바다라는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