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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바다가 주는 느낌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안정감과 고립감입니다. 각박한 생활에서의 피로감을 달래주는 넓고 아늑한 어머니의 품일 때도 있고, 주어진 삶의 터전에서 나를 떼어놓는 폭력과 불통의 공간일 때도 있습니다. 기분의 쇄신을 위해서나 사랑의 영속과 축복을 위해서 찾는 바다는 전자의 경우일 것이고 작은 배에 실려 유배의 길을 떠나는 귀양객이나 원치 않는 섬 근무를 떠나는 직업인들에게는 후자의 경우가 될 것입니다. 같은 바다라도 그것 앞에 선, 혹은 그것 위에 놓인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전혀 다른 느낌을 줍니다.

대구에 사는 저에게는 네 개의 바다가 있습니다. 제주, 마산, 부산, 포항의 바다가 그것입니다. 저는 제주도의 한 궁벽한 어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청소년기 때는 마산에서 몇 년간 살면서 학교를 다녔고 부산에도 자주 왕래했습니다. 포항은 성인이 된 이후에 이런저런 인연으로 자주 찾는 곳입니다. 이 네 곳의 바다를 보고 다시 대구로 돌아올 때 늘 느끼는 게 있습니다. “바다가 있어야 비로소 도시가 모양이 난다”는 소감이 바로 그것입니다. 한 번은, 대구에서 태어나 평생을 대구에서 살고 있는 아내에게 슬쩍 제 느낌을 피력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때?”라고요. 그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맞아, 맞아”라고 공감하는 거였습니다. 바닷가 태생이 아니더라도 바다가 주는 그 평형수와 같은 느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는 특히 산비탈까지 올라가 있는 바닷가 도시들의 아기자기한 집들이 보기에 좋았다고 덧붙였습니다. 저는 거기다가 대양(大洋) 위의 해와 달과 별들이 육지의 그것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말을 보탰습니다. “그래?”, 아내는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대양은 그 자체로도 지구의 평형수이지만, 모든 생명체에게 삶의 균형감을 되찾게 해 주는 심리적 치유의 공간입니다. 깊고 넓은 어머니의 품일 때도 그렇고,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이라는 노래가사처럼 ‘찢어지는 아픔’의 대명사일 때도 그렇습니다. 몇 년 전 가수 정재은이 부른 ‘연락선’(반야월 작사, 고봉산 작곡)이라는 노래를 듣고 크게 마음이 요동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노래의 두 번째 소절에 “낯설은 타향 항구에 해도 저문 데 떠나야 할 밤배는 고동을 울리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엄마 잃고 타향을 떠도는 어린 자아의 처량감(청승기)이 최고조에 달하는 부분입니다. ‘낯선 타향 항구’는 이중의 페이소스(비극적 감정)가 깃든 공간입니다. ‘타향’ 인 데다 ‘항구’이기까지 합니다. 낯선 곳인데 또 다른 낯선 곳으로 ‘떠나는 곳’입니다. 장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때도 ‘해 저물 무렵’입니다. 해는 저물어 앞이 캄캄합니다. 그런 시공간에 놓인 어린 주체의 고립감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닙니다. 딱 제가 청소년기 마산에 살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합포만을 바라보며 되씹어야 했던 느낌이었습니다. 반복적으로 그 노래를 들으며 흥얼거렸습니다. 그랬더니 문득 바다가 그리워졌습니다.

살다 보면 까닭 없이 ‘낯선 타향 항구’에 버려진 고립된 주체의 입장이 될 때가 한 번씩 있습니다. 갑자기 ‘우주에 내던져진 먼지 한 톨’과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 바다를 찾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으로 여깁니다. 바다가 단순히 ‘물이 모인 곳’이 아니라는 것을 그 앞이나 위에서 느껴보는 것도 크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바다는 이미 ‘오래된 영혼’이라는 것, 그 장엄에 대한 경험은 인류의 집단 무의식 속에서 면면히 계승되어 온 것이라는 것을 몸으로 직접 느껴보시길 권합니다. 우리 인간들, 그 ‘낯선 타향 항구’들을 하나의 생명집단으로 이어주는 어머니의 탯줄과 같은 것이 바로 바다라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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