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살다 보면 그동안 알고 있던 사람이나 사물, 그리고 단어 같은 것이 갑자기 새로운 느낌이나 의미로 다가오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작은 세상 하나를 새로 얻게 됩니다. 그런 ‘작지만 확실한’ 만남을 자주 겪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렇습니다. 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소소한 행복감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 자가 진정한 현자(賢者)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진리입니다. 이웃 나라의 한 유명한 소설가는 그런 것을 ‘소확행(小確幸)’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는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속옷을 볼 때 느끼는 행복과 같이 바쁜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즐거움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村上春樹, ‘ランゲルハンス島の午後’). 사전을 찾아보니 이와 유사한 뜻의 단어로 스웨덴의 ‘라곰(lagom)’, 프랑스의 ‘오캄(au calme)’, 덴마크의 ‘휘게(hygge)’ 같은 것들이 있더군요. 그만큼 널리 공유되고 있는 삶의 지혜라는 것이겠지요. 저는 엉뚱하게도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습니다. 이른바 ‘소확행’은 중국 은나라의 시조인 성탕(成湯) 임금이 반명(盤銘·세숫대야에 새겨놓은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날로 새로워지기를 노력함)의 의미가 현대적으로 구현된 것이라 보고 싶습니다.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거창한 ‘한 소식’에 목을 매고 사는 것보다는 작지만 확실한, 지금 내 곁에 와 있는, ‘새로운 느낌이나 의미’들을 꾸준히 축적하는 것이 곧 내 삶을 날로 새롭게 향상시키는 첩경이 되고 나아가서 내가 속한 공동체의 평안에 크게 기여하는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이 되면 저절로 준(準) 지상낙원이 되지 않겠느냐는 희망적인 생각도 들고요.

제가 겪은 소확행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십여 년 전쯤 ‘형제’라는 단어에 꽂힌 적이 있었습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던 중이었습니다.

“다시 물고기가 돌기 시작했고 노인은 거의 물고기를 잡을 뻔했다. 그러나 또 물고기는 자세를 바로잡고 유유히 헤엄쳐 나가 버렸다.

네가 나를 죽이는구나, 물고기야, 노인은 생각했다. 그러나 너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나는 일찍이 너처럼 크고 아름답고 침착하고 위엄이 있는 물고기를 본 적이 없어. 그래서 네가 나를 죽인다고 해도 조금도 서운할 것 같지가 않구나. 형제여, 자, 어서 와서 나를 죽여라, 이제 누가 누구를 죽이건 상관없다.

머릿속이 혼미해지고 있구나, 노인은 생각했다. 머리를 좀 식혀야 해, 끝까지 남자답게 고통을 견디도록 온갖 지혜를 모으거나 저 물고기처럼 고통을 견뎌야 해”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형제’라는 단어가 ‘누가 누구를 죽이건 상관없다’에 연결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말이 ‘크고 아름답고 침착하고 위엄이 있는’ 영혼에 수여하는 작위(爵位·벼슬이나 지위)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나중에 조폭 영화 ‘신세계’를 보고 그 의미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고귀한 영혼의 혈통을 나눈 형제들끼리는 누가 누구를 죽이건 상관없다는 늙은 어부의 말이 오랫동안 제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모르긴 해도 제 세숫대야에 그 말이 담긴 이후로는 제 얼굴에 묻은 잡티 하나쯤은 더 씻겨나갔을 것으로 짐작해 봅니다. 한평생 살아오면서 숱한 형제들을 만납니다. 대개는 진짜가 아닙니다. 청새치 형제를 가장한 상어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오랜 기다림 끝에 망망대해에서 형제를 만난 늙은 어부처럼 인생길 어디서든 형제를 만날 것을 믿습니다. 물론 일신우일신, 스스로 형제 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야 되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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