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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완 작가, 정자 시리즈를 마치며···

"500년 전 조선 사대부들의 삶이 낡은 영상처럼 펼쳐지는 신기한 경험"

김동완 여행작가   |   등록일 2018.02.06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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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진의 시인 도연명은 조선 선비의 롤모델이었다. 그는 평택현령으로 지내던 중 감독관이 순시를 오자 ‘쌀 다섯말을 위해 향리의 소인배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며 벼슬살이를 걷어차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때 썼던 글이 ‘귀거래사’다. 귀거래사는 천년 세월이 지나 조선의 벼슬살이들에게 비상구노릇을 했다. 정치에 환멸을 느낀 관리들은 귀거래사를 읽으며 돌아와 살 땅,‘퇴후지지’를 그렸고 집에 도연명 초상화를 걸어두고 계산풍월의 전원생활을 꿈꿨다.

정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각 낙향해 정자를 지었다. 경주와 안동 영천 순천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귀래정’은 정치에 실망하거나 정권의 부당한 처사에 반발하여 낙향한 선비들이 지은 정자다. 귀래정은 귀거래사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들은 상우천고, 즉 천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도연명을 친구로 삼았고 그의 유유자적한 삶을 본받으려고 했다.경주 강동면 운곡서원내 유연정(悠然亭)과 류성룡이 징비록을 썼던 옥연정사 내 ’애오재(愛吾齋)‘도 도연명의 시가 원전이다. 고려 후기의 문신 이인로는 자신의 집 이름을 와도헌(臥陶軒·도연명처럼 몸을 누이는 집)이라고 지었다.

출처지의는 ‘도가 행하여지지 않으면 그 몸을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는 선비들의 처세관이다. 시절이 하수상해 자신의 포부를 펼칠 수 없다고 생각한 선비들은 벼슬자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은일의 삶을 살며 안빈낙도의 지극한 즐거움을 추구했다. 푸른 시냇가에 정자를 짓고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벗 삼아 시와 술, 거문고를 마음에 품으며 풍월주인이 됐다.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선비의 모델이 공자의 제자 증석이다.공자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증석은 “기수에서 목욕한 뒤 무에서 바람을 쐬며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답해 공자를 감동시켰다. 조선 선비들은 증석의 풍류, 유유자적을 닮고 싶었다. 그런 이들이 지은 정자나 누각에는 ‘영귀’ ‘무우’ ‘풍영’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모두 증석의 대답에서 차용한 이름이다. 정치적 좌절을 겪거나 실각한 이들도 정자 문화를 더욱 풍성하게 했다. 이산해는 정철의 탄핵을 받아 울진 평해에 유배를 왔다가 망양정에 시를 남겼다. 이산해의 시판 옆에는 서로 죽고 죽이려던 정치적 라이벌 정철의 관동별곡 시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조선시대 당파 역사의 한 장면이 정자 안에 압축돼 있는 셈이다.

▲ 김동완 여행작가
그들은 정자에서 제자를 가르치거나 술을 마시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시를 쓰고 나라 일을 걱정하기도 했으며 저술활동을 하기도 했다. 자기를 닦으며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치인과 치세의 경륜을 펼치기도 했다. 이렇듯 정자는 산수에서 만나는 조선의 역사서며 한 왕조를 이끈 지도층의 역사 철학 예술 건축 지리관 담은 백과사전이기도 하다.

선비들은 자신의 세계관을 정자 편액에다 내걸고 주변의 이름없는 산과 물, 바위에 이름을 붙여 자신의 정신세계를 구축했다. 편액과 산,물, 바위에 붙여진 이름은 ‘고문진보’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의 정자는 무너지고 불에 타 새로 지으면서 옛사람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아름다운 사람들이 남긴 시와 글이 있어 여전히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다. 지자체와 문화재 관련 기관이 좀더 관심을 가지고 정자를 문화유산으로 관광 자원으로 가꾸고 활용했으면 한다.

‘정자’연재가 100회로 끝이 났다. 지난해 1월 1일 시작해 2년 남짓 동안 매주 게재했다. 정자라는 끈을 잡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500여 년 전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의 삶이 낡은 영상처럼 펼쳐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글을 쓰는 동안은 정자가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 일까 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 답을 소세양의 송순의 면앙정 현판에 남긴 글에서 찾았다 “산과 물은 천지간의 무정한 물건이므로 반드시 사람을 만나 드러나게 된다. 산음의 난정이나 황주의 적벽도 왕희지나 소동파의 붓이 없었다면 한산하고 적막한 물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이름을 드리울 수 있었겠는가?”

부족한 글이 100회 동안 게재되도록 마음을 써 준 경북일보 한국선 사장, 이동욱 편집국장, 조현석 뉴미디어국장, 편집부기자 등 관계자들께 감사드린다. 재미없는 글을 읽어주고 격려해주신 독자들께도 고개 숙여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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