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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계 한덕련 선생, 생애·당파 초월한 정신

일제 칼날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실행한 곧은 행동 본받아야

이완재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   등록일 2018.02.1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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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계 선생
송계 한덕련 선생은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이자 유학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시대의 표상이 되신 선현이다.

영남 퇴계학파의 학통을 이은 낭산 이후 선생과 호남의 기호학파의 학통을 이은 간재 전우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당파와 학파를 초월하려 했던 학자다.

최근 우리 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각종 병폐와 정치권의 고질적인 당권싸움을 바라보면서 “당파싸움은 절대 안된다”며 폐단을 지적했던 선생의 일생을 조명한 이완재 영남대학교 명예교수의 논문을 통해 현 세대가 본받을 점을 짚어본다.

△송계 한덕련 선생

송계 선생의 성은 한 씨요 휘는 덕련으로 최근세 영남이 낳은 큰 유학자다. 1881년(고종 18년) 11월 27일에 태어나 1956년 10월 7일 타계하시기까지 76년의 일생 동안 국권을 상실하는 한말의 풍운, 36년간의 일제 식민생활, 그리고 광복의 환희 등 격변의 한 시대를 살고 가신 분이다. 그 광란과 격동의 한 시대를 살면서도 선생은 평생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온건한 유학자의 자세를 견지했고 후진의 계도에 혼신의 정력을 바쳤으니 실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한 시대의 사표라 할 수 있다.

선생은 일생 동안 많은 문적을 남겼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이 그 문적을 정리해 총 24권 10책의 방대한 문집을 간행했다.

어려운 한문으로 돼 있던 문집은 최근 국역본이 나와 선생의 학문과 사상이 널리 이해되고 보급되고 있다.

오늘날 서양의 주지주의적인 학문개념이 일반화되면서 학자란 단순히 지적 활동에 종사하는 자로서 풍부한 지식의 소유자라는 관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동양의 전통적인 학자개념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특히 유학에 있어서 학문은 바로 도의 추구로서 구체적인 실천을 떠나서 학문을 논할 수가 없었다. 참다운 학자란 학문적인 지식과 실천적인 덕을 겸비하여 학행이 일여 할 때 비로소 참다운 학자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송계 선생으로부터 참다운 학자의 면모를 찾아볼 수가 있다.

서원전경
△생애

한덕련 선생은 한잠범 공과 어머니 김해김씨의 아들로 경북 신녕의 화산 아래 교전리에서 태어났다. 용모가 단정하고 성품이 방정했다. 서당에 다니면서 글을 배우게 돼서는 재주가 뛰어나 스승의 독려 없이도 학업의 진척이 남달리 빨랐다.

유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하루는 아버지인 소송 공에게 ㅅ·ㅁ의 등급에 대해 묻더라는 것이다. 이에 소송 공이 어리석은 사람과 어진이의 구분이 있음을 들고, 이어 주렴계의 『통서』의 기록인 “선비는 현인을 본받으려 하고, 현인은 성인을 본받으려 하고, 성인은 하늘을 본받으려 한다.”는 내용을 설명하니, 이로부터 선생은 성인 되기를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기록에는 9세 때 꿈을 꾸었는데 어떤 큰 건물에 들어서니 한 훌륭하신 어른이 중앙에 앉아 계셨다. 그리고 좌우에는 많은 분들이 열을 지어 섰는데, 선생이 들어서니 그중 한 사람이 “여기는 공자께서 학문을 강론하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비록 한갓 꿈 이야기라고는 하나, 이는 어린 나이에도 성현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정성이 꿈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런 기록들을 미루어 보면 아마도 선생은 천성이 도에 가까운 분이었을 듯싶다.

선생의 학문은 서숙에서 자학을 익히고, 이어 부친인 소송 공에게서 가학을 전수 받은 듯하다. 15세에 『논어』 향당편을 읽고 “성인의 도는 일용의 평상 가운데 있는 것이고, 결코 아득히 높고 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로다.”라고 하는 구절에서 유가의 학문 정신을 진작 체득했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생이지지인 공자도 위편삼절토록 공부하셨는데 하물며 범인에 있어서리오?”하고 잠시도 쉬지 않고 사서오경과 제자백가의 전적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 무렵 간재 전우께서 『표고천하문』을 발표함에 이에 감동한 소송공이 선생으로 하여금 간재 문하에 입문토록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입문의 연도와 수학의 연수에 대한 기록은 전혀 찾아볼 길이 없다.

한덕련 선생 문집원본
△이기론

공자에서 시작된 유학은 송대에 이르러 새로운 유학, 즉 성리학으로 발전한다. 신유학을 성리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성명과 이기의 관계를 논한 유학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이와 기는 성리학에서 자연과 인간사회의 존재와 운동을 설명하는 주된 개념이다. 그래서 성리학자라면 누구나 이기의 원리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갖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려고 한다.

하지만 송계 선생은 이기론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결코 드러내놓고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미묘한 이와 기의 관계 설정으로부터 학파가 나뉘고, 이것은 다시 당파로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해 송계 선생은 “우리나라의 유학 이론이 조선 중기 이래로 서로 뜻이 맞지 않아 싸움이 날로 심하여, 그 폐단이 마침내는 남의 집과 나라까지 망치게 하는데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럼 에도 아직 그치지 않고 이따금 일어나서 옳고 그름을 뒤바꾸어 놓고는 오직 나와 뜻이 같으면 함께하고 나와 뜻이 다르면 배척합니다. 이것이 어찌 예의의 나라에서 마땅한 바이겠습니까?”라고 비판하였다.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송계 선생은 “오직 깨달은 바를 따르고, 점차 스스로를 새롭게 하여 단지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하여 선한 것들을 모아 하나의 참된 것으로 돌아가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송계 선생은 어떤 사람이 편지로 “이는 어디에서 생겨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기와 채용의 선후에 대한 분별을 일찍이 듣기는 하였습니다. 형이상적으로 말하면, 이는 기보다 앞서 존재합니다. 주자께서 이른바 천지가 생기기 이전에 먼저 이 이치가 있었다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이는 기가 있은 뒤에 드러납니다. 주자께서 이른바 기로써 형체를 이루고서야 이가 또한 거기에 주어진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이가 먼저고 기가 뒤인 것입니다.

이기를 대대의 관계에서 보게 되면, 기는 체가 되고 이는 용이 됩니다. 소강절 선생이 이른바 체는 천지의 이후에 성립되고, 용은 천지의 앞에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주재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체가 되고 기는 용이 됩니다. 주자께서 이른바 체가 성립된 뒤에 용이 행해진다고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연유를 설명하는 것이 한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그 분별도 역시 서로 뒤섞이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이가 없는 기가 없으니, 아마도 이로서 체를 삼고 기로서 용을 삼는 것이 주가 되고 근본이 되는 것이 마땅한 듯합니다. 그러나 기가 아니면 이가 스스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옛날 선비들 역시 기가 없으면 이는 걸릴 곳이 없다는데 있었던 것입니다.”

송계 선생이 여기에서 말하는 이기론의 핵심은 이와 기가 혼륜무간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는 기보다 앞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기의 관계에서 주리적 입장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송계 선생이 자신의 이기론을 펼친 『심성과 이기에 관한 문답』이라는 글에서 “결론적으로 말해서 실제적 작용에 있어서는 오직 이를 내세우고 기를 억제하고, 이를 따르고 기를 기르는 것이 아마도 처고 성현의 바꿀 수 없는 큰 법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주장한 것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기론은 퇴계의 철학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송계 선생이 이기론에 관한 한 퇴계의 『성학십도』에 실린 것이 “진정 아홉 번을 달인 명약”이라고 말한 것이다.

한덕련 선생의 친필병풍
△당파를 초월한 정신

당파 문제는 송계 선생 당시의 문제만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미 있어 온 일이었다. 그래서 선생의 아버님이신 소송 공께서도 일찍이 『논어』의 “군자는 마음이 평탄하여 넓디넓다.”라는 말과 “군자는 두루 사랑하되 편당을 짓지 않는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당파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마을을 갖고 스스로 실천하도록 당부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성씨의 사람이며, 어떤 지역의 출신이며, 누구의 제자라는 등의 꼬리표가 자연스럽게 따라다닌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가 소속된 혈연·지연·학연 등에 의해 의견이 결정되어 진다.

만약 소속된 단체가 자신의 견해와 다르다고 해서 자기의 것을 고집하게 되면, 그는 그 단체들로부터 배척당할 뿐만 아니라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당파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모든 사회적 배경과 그로부터 생겨나는 권한을 포기하고, 그로 인해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을 각오해야 하는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다.

우리는 송계 선생이 스승인 간재 선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로 이러한 용기와 의지를 보게 된다.

“생각해보면 우리 선생님께서는 오래 쌓은 학덕과 뭇사람의 신망이 우뚝하여 마치 황하의 강물 가운데 서 있는 돌기둥과 같으십니다. 몇몇 훌륭한 제자들이 선생의 가르침을 이어서 규약을 정하였으니, 그것은 곧 우리 유학을 일으키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천명을 두려워하고, 성인의 말씀을 존중하고, 지켜야 할 의리를 세워서 이를 목숨을 걸고 지킬 것을 근본의 뜻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오로지 자기를 확립하는 공부에만 힘쓰고, 다른 유학자들의 시비에는 관여하지 않기를 분명하게 밝혔으니 매우 장한 일입니다. 이는 우러러 축하를 드릴 일이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려할만한 것은 선생님께서 우리나라 유학을 말씀하시면서 율곡과 우암에게 편중되게 말한 점입니다. 단지 한 지방만을 힘쓰게 하려 한다면 부당함이 없겠으나, 온 나라를 두루 구하고자 하면서 이같이 말하면 비록 서로 어긋나서 생기는 다툼을 없애려 한들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은 유학을 일으키는데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아마도 옳지 못한 결과가 도리어 율곡과 우암에게 미칠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가르침에 또한 편벽된 바가 있다고 여기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생각컨대 ‘정자, 주자, 율곡, 우암을 이어서 서술한다.’라고 하는 어구의 표현에는 적지 않은 결함이 있습니다. 차라리 고쳐서 ‘자사, 맹자, 정자, 주자를 이어서 서술한다.’라고 하면, 우리나라의 현인들을 비록 일일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역시 그 가운데 포함되어서 해로울 것이 없고, 보는 사람들도 틀림없이 불평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을 설득하고, 우리 유학의 뜻을 일으키는 데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밝은 가르침을 주시어 사리에 어두운 이 사람을 계발해 주십시오.”

서원전경
송계 선생은 스승인 간재 선생이 우리나라의 유학사를 기술하면서 공자에서 시작된 유학의 정통이 정자와 주자를 거쳐 우리나라에서는 율곡과 우암으로 이어졌다고 한 것에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기호학파를 계승한 간재 선생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상대인 영남학파의 쪽에서 자신들을 무시한 이러한 기술에 대해 좌시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계 선생이 이것에 대해 “한 지방만을 위한 것이라면 부당함이 없겠으나, 온 나라를 두루 구하고자 한다면 다툼을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한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모두가 인정하는 중국의 학자들을 기술하고 우리나라의 현인들을 일일이 거론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하였다.

이 사실을 보면 송계 선생이 학문을 함에 그 정신이 얼마나 불편부당한가를 알 수 있다. 비록 자신의 스승이라 할지라도 학문에 편당을 지우려 한다면 주저 없이 그 옳지 않음을 지적하여 바르게 하도록 간언하였다. 이는 스승에 대한 항거이자 사문에 대한 배반이라고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비난은 송계 선생이 영남에 거주하면서 기호학파의 학자를 스승으로 모실 때 이미 각오한 것이었다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송계 선생의 행동은 곧고 바르며, 학문은 불편부당하였다. 비록 일제의 칼날 앞이라 할지라도 두려움 없이 실행하고, 스승의 말씀이라도 옳지 않음이 있으면 간곡한 말로 아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선생의 이런 모습은 지금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지금 우리가 선생을 새삼 기억하여 추모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앞으로 선생에 대한 연구가 더해진다면, 우리는 선생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깊은 존경의 염을 갖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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