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국 경산지역위원·문학박사
불가에서는 인간 본성과 선악의 잣대를 자신의 마음속에 지어 놓은 창고를 비유한다. 이를테면 그 창고 안에 얼마나 많은 선업(善業)을 쌓았느냐에 따라 다음 생의 복덕(福德)을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는 우리 설화 장르에도 다양한 양상으로 전승되고 풍수지리학에서도 각가지 소응(所應)의 잣대로 천하명당의 형국보다 당사자가 생전에 지은 보시(普施)로 가름한다 하였다.

한 예로, 한 효자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명당에 모시고자 백골을 걸머지고 3년간이나 전국 명산대천을 헤맸으나 마땅히 명당지지를 찾지 못하자 마지막으로 높은 산에 올라서서 불효자를 용서하라는 통곡과 함께 아버지의 백골관을 산 아래로 밀쳤더니 그 관이 데굴데굴 굴러 머문 곳에다 장례를 하였다 했다. 물론 이로써 효자는 가슴을 치며 자신의 불효를 한탄하였지만, 결국 당사자는 자신이 생전에 쌓은 복덕으로 효자가 찾아내지 못한 천하명당을 구할 수 있었다 하였다.

이는 곧 평소 자신이 살아온 업에 의하여 사후에도 그에 상응하는 소응(所應)이 돌아온다는 논리로 이를테면, 천하제일의 명당지지라 할지라도 그 명당의 주인자격이 없는 자는 그 어떤 권력과 재력으로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법칙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어야 한다. 만약의 경우 천하제일의 명혈(名穴)에 희세(稀世)에 흉악무도한 범죄인의 묏자리가 된다면, 이로써 사후에 후손은 물론 장본인에 이르기까지 발복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는 분명 악령의 음모요, 장난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혹자는 자신의 선업을 몽상(夢想) 경험에 비유하기도 한다. 즉, 꿈속에서 길을 걷고 있을 때 일어서지도 못한 남루한 거지가 나타나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걸머쥐고 ‘1000원짜리 한 장만’하고 구걸하였을 때, 이를 선뜻 응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에 대하여 이의 선업의 잣대로 가늠할 수 있다 한다.

이는 인간 본성의 초자아적 발상을 시험하는 사례로 본성이 착한 자는 몽상 중에도 생전과 같이 적선을 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자신의 지갑 속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5만 원짜리 지폐만 가득히 보일 뿐 아무리 뒤져도 천 원짜리 지폐는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선자는 지갑을 통째로 동전통에 던져도 자신에게 복이 싸이고 그렇지 못하는 자는 몽상 중에도 인색하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황금을 돌같이 하라’ 실제 우리 설화에는 황금을 돌 같이 본 사람이 있다. 이는 물론 인간이 죽어 사후에 경험한 구전설화의 한 토막이지만 분명 이야기 속에는 황금이 곧 돌이란 걸 뒤늦게 뉘우친 사람이 있다.

때는 조선 중기로, 70평생을 오로지 돈만 알고 돈에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온 한 노랭이의 애틋한 사연이다. 그는 평생 모은 돈을 금덩이로 바꾸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저승길에도 누가 자신의 황금을 빼앗을까 전전긍긍하면서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된 체 상제(上帝) 앞에 이르자 상제께서 이르기를 ‘너는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리 고생을 하였느냐?’ 하자 ‘이는 천하에 제일 가는 보물이다’ 답하니, 사자(使者)가 그를 인도하여 천상(天上)에 냇가로 인도하니, 그의 눈앞에 냇가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돌멩이가 모두 금덩이라, 그만 땅을 치고 통곡하였다 한다.

물론 최소의 금전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존재임은 누구나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돈으로 하여금 인간의 본성이 구속되고 만다면 그보다 불쌍하고 어리석은 자가 또 있을까 싶다.

적선과 돈은 서로 간 대칭되는 존재라기보다 서로 소통하여야 빛이 날 수 있다는 이 단순한 진리 앞에 우리는 하루빨리 해방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창고에 비록 자그만 하지만 나만의 선업을 차곡차곡 쌓아 갈 수 있다면 굳이 이승과 저승이 따로 있다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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