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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시간관념 없는 사람과 교제하는 일은 참 힘듭니다. 약속 시간보다 최소한 10분이라도 먼저 도착해야 마음이 편한 사람들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든 존재들입니다. 보통 그들은 약속 시간이 다 되어서야 길을 나섭니다. 그 시간에 집에서 나오거나 전(前) 장소에서 출발합니다. 도착 시간은 도로 사정에 따라서 달라지겠습니다만 대개는 정해진 자기만의 시간이 있습니다. 5분 지각생, 10분 지각생, 30분 지각생 등등, 고유한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운동모임, 봉사모임, 스터디모임, 부부계모임 같은 것을 수십 년 동안 해 온 경험칙에 따르면, 그들 시간관념 없는 이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입니다. 태생적으로 타자공동체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민족이니 공동체니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앞으로 나와 나의 가족에게 무슨 좋은 일이 생겨야 하나?’가 유일한 인생의 화두입니다. 둘째, 그들은 스스로 사교적인 성격이라고 자부합니다. 반죽이 좋은 편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시간관념을 비난하는 사람을 비사교적인 인물로 치부해 버립니다. 배려심 없는 것에 대해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셋째, 그들은 모임의 가치와 비중을 중시합니다. 동물적인 육감으로 이른바 모임의 ‘영양가(營養價)’가 어느 정도인지를 금방 알아차립니다. 모임의 정치적 경제적 가치가 하락하면 태도가 금방 달라집니다. 지각 시간이 길어지거나 결석이 잦아집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그런 그들도 늙어가면서는 ‘세월 앞에 장사 없다’라는 진리를 거역하지 못합니다. 젊을 때의 그 영악한 ‘시간관념’을 제대로 고수 못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처량하게 ‘영양가 없었던’ 주변의 동정이나 도움을 구걸할 때가 종종 생깁니다.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사실 ‘시간관념’이 그런 뜻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을 소중히 여기거나 시간을 철저히 지키려는 의식이나 생각’이라는 뜻 이외에도 다른 뜻으로 사용될 때가 있습니다. 다음처럼 ‘시간과 공간, 삶에 대한 인식’으로 사용될 때도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와는 다른 시간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세계에 대한 다른 차원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 조니가 저녁 시간에 늦었을 때 우리는 “도대체 너 지금까지 어디 있었니?”하고 묻고 조니는 “아무 데도 없었어요.”라고 대답한다. 혹은 우리가 “도대체 너 지금까지 뭐하고 있었니?”하고 묻고 조니는 “아무 것도 안 했어요.”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은 시간과 시계와 시간표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 대한 일종의 미묘한 위협이기 때문에, 우리는 당혹스러워진다...’(마리아 니콜라예바(김서정), ‘용의 아이들’)

아이들의 시간관념이 어른과는 많이 다르다는 설명입니다. 의미 없으면 시간이 아니라는 거지요. 어릴 때 학교에 다녀오는 저를 보고 “오늘 뭐 배웠니?”라고 묻던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아무것도 안 배웠어요” 저는 늘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정서가 불안하고(생활기록부에 그렇게 적힌 걸 봤습니다) 주의가 산만해서(늘 공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선생님께 배운 게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았던 거죠.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는 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제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정서불안에 주의 산만했던 제가 집중력을 발휘해서 열심히 공부한 때는 통틀어서 2~3년에 불과했습니다(그 밑천으로 근근이 지금까지 버텨왔습니다). 크게 반성이 됩니다. 앞으로는 보다 더 정서를 안정시키고 주의를 집중해서 여생을 의미 있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족 한 마디. 지금은 우리 민족에게 ‘시간관념’이 아주 중요한 때인 것 같습니다. 정서 불안하고 주의 산만한, 죄책감 없는 지각생으로 살아선 결코 안 될 때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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