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 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감상) 마음의 공장에서 더 이상 아무 것도 생산하지 못한다고 부도 선언을 하고 돌아오는 길. 길고양이 새끼들이 자꾸 내 뒤를 따라왔다. 발을 멈추면 발등에 몸을 비벼댔다. 그들을 밀어내고 종종걸음으로 돌아와 누웠을 때 자꾸만 떠오르던 그 고양이들의 감촉. 나는 정말 실패했을까.(시인 최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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