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식’과 ‘예식진’ 동일인물일 가능성 높아

예식진묘비명

신라군과 백제군이 합세하였을 때, 갑자기 새 한마리가 소정방의 진영 위에서 맴돌므로 사람을 시켜서 점을 치게 했더니, 반드시 원수(元帥)가 상할 것이라 하였다. 소정방이 두려워하여 군사를 물리고 싸움을 중지하려 하므로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이르기를, “어찌 나는 새의 괴이한 일을 가지고 천시(天時)를 어긴단 말이오. 하늘에 응하고 민심에 순종해서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데 어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소!”하고 신검(神劍)을 뽑아 그 새를 겨누니 새는 몸뚱이가 찢어져 그들의 자리 앞에 떨어진다. 이에 소정방은 백강(지금의 금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서 산을 등지고 진을 치고 싸우니 백제군이 크게 패했다. 당나라 군사는 조수(潮水)를 타고 전진하여, 백제의 도성(都城) 30리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이때 백제는 군사를 다 내어 막았지만 패해서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당나라 군사는 이긴 기세를 타고서 성으로 들이닥쳤다.

의자왕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탄식한다. “내가 성충의 말을 듣지 않고 있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하고는, 태자 융(隆)과 함께 북비(北鄙)로 도망했다. 소정방이 그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성을 굳게 지켰다. 이때 문사(文思)가 태(泰)에게, “왕이 태자와 함께 성에서 나가 달아났는데 숙부(叔父)가 맘대로 왕이 되었으니,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한 것을 풀고 물러간다면 그때에는 우리들이 어떻게 온전할 수가 있겠습니까?”하고는 좌우 사람들을 거느리고 성을 넘어 나아가자 백성들은 모두 그를 따르니 태(泰)는 이것을 말릴 수가 없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시켜 성첩(城堞)을 세우고 당나라 깃발을 꽂으니 태(泰)는 일이 매우 급해서 문을 열고 항복하기를 청했다. 이에 왕과 태자 융(隆), 왕자 태(泰), 대신 정복(貞福)과 여러 성이 모두 항복했다. 소정방은 왕 의자와 태자 융, 왕자 태, 왕자 연(演) 및 대신·장사(將士) 88명과 백성 1만 2,807명을 당나라 서울로 보냈다.
 

어린이역사 교재, 백제의 꿈에 나오는 사비성의 모습

이상이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그런데 여기에 백제의 멸망과 관련하여 보충할 내용이 있다. 즉, 의자왕이 태자 융과 함께 웅진성으로 달아가 후일을 도모하였고 수도인 사비성에 남아 있던 둘째 아들인 태가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그러다가 태는 사비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한편 웅진성에서는 아마도 그곳의 성주 예식령이 반란을 일으켜 의자왕을 당나라군사에 넘긴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 상세한 전모를 논하기는 어렵지만,《구당서(舊唐書)》및 《신당서(新唐書)》에,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할 당시 백제의 장군이었던 예식(?植)이 의자왕을 데리고 와서 항복하였다(其大將?植 又將義慈來降)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 ‘예식’과 ‘예식진’이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고 2006년 중국 서안에서 ‘예식진묘지명(?寔進墓誌銘)’이 발견되었는데, 예식진은 별다른 공도 없이 당에서 정3품 좌위위대장군(左威衛大將軍)의 높은 벼슬과 대우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자왕이 예식진 등을 데리고 항복한다가 맞는 표현이지, 예식진이 의자왕을 데리고(또는 잡아서) 항복하였다는 것은 그가 배신하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KBS ‘역사추적’에서 상세히 보도한 바 있음).

1300여년이 지난 2000년 4월, 낙양시 북망산에서 의자왕 영토(靈土) 반혼제(返魂祭)를 올리고, 의자왕과 태자 융의 고혼은 영토와 함께 고국으로 돌아와서, 동년 9월 부여 능산리 선왕의 능원에 잠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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