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임자를 잘 알아···아무나 할 수 없는 일 아무 소리 말고 맡아!"

故 박정희 전 대통령(왼쪽)과 故 박태준 명예회장
종합제철공업단지 기공식과 토지보상및 부지조성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종합제철건설의 숨 가쁜 시간이 지나고 잠시 한 숨 돌릴 즈음, 자금조달문제와 실무추진기구의 발족이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쏟아지는 각종 대내외 문제에 즉각적으로 대처하고 책임 있는 사업추진이 필요했던 정부는 종합제철사업의 신속한 진행을 위해 <종합제철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한다.

정부는 1967년9월께 종합제철회사의 사장으로 내정 해 두었던 박태준 대한중석사장을 추진기구의 위원장으로 염두에 둔 상태였다.

포스코50년 歷史에 항상 따라다니는 인물, 박태준은 이 <종합제철 사업추진위원회> 구성을 계기로 전면에 나선다.

종합제철추진위원회 첫 회의 주재(1967.11)
1. ‘종합제철사업추진위원회’의 가동

1967년10월20일에 한국정부를 대표한 박충훈부총리와 국제차관단(KISA)을 대표한 샌드배크 부사장 사이에 종합제철 건설에 관한 기본협정이 체결되었다.

이처럼 KISA와의 기본협정이 체결되면서 정부는 1967년11월8일에 경제기획원 장관 자문기관의 형식으로 <종합제철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실수요자인 대한중석 사장이었던 박태준 위원장을 포함하여 대한중석 3명, 민간 전문가 3명, 차관보급 공무원 6명 등 총 12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위원회는 대한중석의 박태준사장으로 하고 관련부처의 차관보급을 위원으로 포함시켜 민관을 망라한 기구였으며, 그 아래 상임위원회를 두어 실질적인 업무를 처리토록 했다.

박태준 위원장외에 위원으로는 이우용 상공부차관보, 고준식 대한중석전무, 정문도 경제기획원차관보, 김규원 대한중석이사, 진봉현 경제기획원차관보, 이홍종 조선공사이사, 이재설 재무부 재정차관보, 윤동석 서울대교수, 김득조 건설부기획관리실장, 최형섭 한국과학기술연구소장, 양탁식 경상북도지사 등이다. 구성을 놓고봐도 이 위원회는 박태준사장을 사실상 장관급으로 대우하는 기구였다.

11월10일에는 위원회의 제1차 실무회의가 청와대에서 열렸는데, 여기서 정부사업에 해당하는 항만, 철도, 전력의 공급에 대한 대책이 논의됐다. 첫 실무회의에서는 종합제철건설의 굵직한 가이드라인을 결정했다.

종합제철사업추진위원회 1회 회의자료
특히, 항만규모와 관련 건설부는 최초 5만톤 선박이 접안할 수 있도록 한 후 향후에 8만톤과 10만톤으로 확장한다는 계획을 제시했지만 박태준위원장은 외국의 실례를 들면서 처음부터 10만톤 규모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해 의견을 관철시켰다.이 밖에도 박태준사장의 강력한 주장으로 상법상의 ‘주식회사’ 형태로 종합제철설립을 추진키로 의견을 모았다.

사실은 종합제철 사장에 내정된 박태준이 종합제철단지 기공식에 불참한 것도 이 문제 때문이었다. 그는 1967년10월3일 종합제철공업단지 기공식 며칠 전에 <종합제철사업추진위원장>으로 내정됐지만 사업추진 자금부족액이 정부 재정자금으로 충당해야 하고 민간주주에 대한 배당이 보장되어야 하는 주식회사형태로 설립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박정희통령이 박태준위원장의 건의를 받아들임에 따라 신설회사는 상법상의 주식회사로 설립키로 결정 된 것이다

이날 실무회의 내용을 보고 받은 박정희대통령은 관계부처 장관들에게 종합제철소건설에 대한 자신의 각오를 피력하면서 전력을 다해 박태준을 지원해 줄 것을 지시하고 ‘종합제철건설에 관한 일반지침’을 시달하면서 종합제철사업은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야 할 민족적 사업이라고 성격을 규정했다.

또 대통령은 이 지침에서 종합제철건설이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핵심사업의 하나로 제선ㆍ제강ㆍ압연부문을 모두 포함하는 일관작업을 할 수 있는 綜合제철을 건설을 분명히 못 박고 1971년까지 완공할 것을 명시하면서, 외자 약 1억달러, 내자 약100억원, 정부지원시설비 약70억원을 투입할 건국이래 단일사업이라고 강조했다.

1968년 11월 첫 방문
또 한달 새 2차례나 회의를 열어 속전속결 행정정차를 진행하던 위원회는 1967년12월28일에 제3차 회의를 열어 1968년 3월까지 회사의 설립에 필요한 모든 업무를 완결시킨다는 목표를 설정한 후 구체적인 업무일정계획을 결의했다. 위원회는 회사 설립 이후에도 관계기관과의 협조를 위해 위원회를 존속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정부에 건의했으며, 정부는 1968년1월25일에 대통령령으로 종합제철공장사업추진위원회 규정을 공포하기도 했다.

그 후 위원회는 1968년3월4일에 제4차 회의를 열어 가칭 ‘한국종합제철주식회사’의 설립 목적과 방법을 결의했으며 3월6일에는 발기인 대회를, 3월 20일에는 회사 창립총회를 열게 하는 등 포항제철주식회사가 1968년4월1일 창립하기 까지 실무적인 종합추진 업무를 주도적으로 추진했다.

위원회의 절차를 통해 <포항제철주식회사>는 창설요원 39명의 규모로 1968년 4월 1일 에 정식으로 출범하게 된다.

5.16기념 리셉션에사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과 비서실장 박태준(맨 오른쪽)
2. 종합제철 경영책임적임자, 박태준사장

조강생산 2천100만톤 25년 대장정 마무리報告

박정희대통령이 대한중석을 종합제철건설 실수요자로 낙점한 것은 효율적인 내자조달이라는 실무차원의 고려도 있지만, 종합제철건설을 맡아 소임을 완수할 적임자로 일치감치 박태준사장을 의중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태준사장은 5.16을 주도한 박정희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맡고 있을 때 비서실장과 상공담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했다. 최고위원재임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입안에 관여한바 있으며, 대한중석사장으로 있던 1965년에도 일본에서 제철소를 가장 효율적으로 건설한 것으로 알려진 가와사키제철의 니시야마야타로사장을 초빙하여 유력한 후보지를 함께 답사하면서 제철소건설에 관하여 자문을 하기도 했다. 그때 박정희대통령은 박태준에게 제철에 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라고 지시해 놓았으며 박태준은 대한중석 부설연구소에 제철소건설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모래벌을 일구며 공장을 건설하고 있는 모습 (1967~71)
제철소 부지조성(1968년 연일 형산강 상공에서)
이처럼 박정희대통령이 종합제철건설의 실수요자로 대한중석을 낙점한 것은 바로 대통령의 심중을 읽고 있을 뿐 아니라 탁월한 경영능력을 검증받은 박태준사장에 대한 깊은 신뢰 때문이다.

대통령은 이미 오래 전부터 박태준을 종합제철 건설의 사령탑으로 낙점해 놓고 복안대로 그 자리에 박태준을 심는 ‘특명’을 내렸고 먼 후일 1992년 10월3일 박태준은종합제철의 경영자를 맡은 지 꼭 25년 만에 조강생산 2천100만톤 체제를 완공한 후 한지 두루마리 뭉치에 자필 붓글씨로 적은 두툼한 보고서를 들고 동작동 박대통령의 국립묘지를 찾아간다.

“각하의 명을 받아 25년 만에 제철입국의 업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음을 각하의 영전 앞에 보고합니다“ 라고 보고하며 흐느꼈다.

그리고 19년 후 2011년12월13일, 박태준은 박대통령 바로 곁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1992년 10월3일 박태준의 임무완수 보고
3. 선생과 제자, 강철처럼 질긴 인연 (박정희와 박태준)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역사와 궤를 함께하고 있는 포스코의 50년역사는 박정희대통령과 박태준 명예회장의 만남에서부터 출발했다.

두 사람은 교관과 생도로 처음 만나, 5.16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에는 의장과 비서실장으로, 그리 국가 대역사였던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건설책임자와 대통령으로 이어지면서 강철과 같이 단단한 운명을 나눈다.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초대 사장 박태준과 박 대통령의 첫 만남은 1948년, 현재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경비사관학교>에서 교관과 학생으로 시작됐다.

현재의 육군사관학교인 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한 박태준은 1948년 탄도학 강의시간에 교관 박정희소령과 만난다. 대포의 탄착지점을 계산하는 어려운 문제를 교관이 칠판에 적었고 박태준생도는 유일하게 그 문제를 풀었다. 수학 잘 하는 학생 박태준과 박정희교관의 만남은 그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비서실장으로 인연이 이어졌고 대통령의 요청이 있을 때면 언제든지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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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웅 논픽선·탐사기록 작가
내향적 성격이 서로 비슷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까지도 닮았던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라는 어려운 관계를 벗어나 인간적인 정을 쌓았다. 1963년10월 박정희는 대통령에 당선고 박태준은 소장진급과 함께 민간인이 되었다. 1964년에는 37세의 나이로 국교정상화관련 대통령 특사로 일본에 파견되었고 그해 연말에는 적자에 허덕이던 대한중석 사장으로 임명돼 1년만에 회사를 정상화시키는 등 두 사람은 상하관계가 아닌 또 다른 한 몸 “분신” 이라 할 수 있었다.

박정희와 박태준의 관계는 박태준 명예회장이 박대통령 묘지에서 낭독했던 보고서 한 구절에 기록됐던 1967년9월의 육성 특명(特命) 한 구절이 잘 말해준다.

“나는 임자를 잘 알아.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어떤 고통을 당해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할 수 있는 인물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어. 아무 소리 말고 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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