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현대 시공간 어우러져 동해안의 숨결 된 길

죽변항
이른 아침에 만난 죽변항은 생동감이 넘쳤다. 고깃배들이 물살을 가르며 쉴 새 없이 들어왔고 덩달아 갈매기도 바쁘게 끼룩댔다. 어항을 떠도는 비릿한 공기조차도 싱싱하게 느껴진다. 날것의 냄새들은 파란 하늘로 날아올랐고 방금 도착한 어선에서 내린 대게로 어판장은 금세 풍성해졌다.

선주별로 잡은 게를 진열하기 시작했다. 허연 배를 위로해서 나란히 줄 세운 뒤 열 마리째는 등을 보이게 진열한다. 이유는 빠른 계산을 위해서다. 뒤집힌 게들이 집게발로 허공을 긁어댄다. 이렇게 해놓는 이유는 움직임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똑바로 해 놓으면 게들은 여기저기로 기어갈 것이고 저들끼리 달라붙기도 해 한 마디로 게판이 되고 만다.

게는 다리가 중요하다. 하나라도 떨어지면 상품 가치가 현저히 떨어진다. 크기별로 작게는 수십 마리, 많게는 백여 마리씩 진열이 끝나면 곧바로 경매사가 오고 상인들이 주위를 빙 둘러서서 각자 원하는 가격을 적는다. 거래가 완료된 게는 커다란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겨 순식간에 이동된다. 모든 거래는 빠르고 정확하다. 시간이 왜 돈인지 설명이 필요 없다.

속이 덜 찼거나 다리가 떨어진 게도 경매에 들어간다. 낙찰된 게는 그 자리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대상은 주로 일반 소비자인 경우가 많다. 그렇게 구매한 게는 근처 상점에서 쪄서 포장해서 가져갈 수 있다. 그 금액은 별도다. 어판장의 아침엔 살아 있는 냄새가 물컹물컹 올라온다. 하루하루 살아 내는 사람들의 숨결이, 투박한 손이, 닳은 손톱과 굵은 주름이 경이롭다.

대게 경매 장면
죽변항의 아침풍경
노동을 끝낸 손수레가 수산물회직판장 앞에 나란히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가자미가 꾸덕꾸덕 말라간다. 바람은 기분 좋게 불어오고 봄은 무럭무럭 자란다. 죽변4리 동화회관을 지나니 등대로 올라가는 나무 길이 나온다. 나무계단 옆으로 대나무 숲이 이어진다. 서걱대며 서로의 몸을 치는 소리에 상큼함을 느끼며 언덕에 올라서면 눈 아래로 죽변항이 고즈넉이 펼쳐진다. C자형의 방파제가 어항을 품어주고 있다.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다. 코끝을 간질이는 바람도 푸른 맛이다. 이곳이 대륙으로 보면 독도와 최단 거리이다. 216.8km 떨어진 곳에 푸른 바다, 천혜의 지하자원을 품고 앉은 독도가 있다. 오랜 세월 일본과 영토분쟁에 시달려 왔지만, 그 어떤 세파에도 독도는 위용을 잃지 않는다. 강건함에서 우리 민족의 핏줄이 느껴진다. 피가 어찌 사람의 몸에만 흐를까. 남의 핏줄을 탐하는 저들의 욕심이 이쯤에서 멈춰지길 바란다.

새하얀 죽변 등대가 해와 달 조형물을 앞세운 우뚝 서 있다. 푸른 바다와 궁합이 잘 맞는 마을길을 내려오니 오른쪽에 SBS에서 특별기획으로 제작한 ‘폭풍 속으로’ 드라마 촬영 장소가 반긴다. 고기잡이 아버지 밑에서 자란 형제와 그들에게 다가온 운명적인 사랑, 그리고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드라마. 이덕화와 송윤아가 출연해 시청자에게 진한 감동을 안겨주었던 집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하트 해변이 낭만을 더한다.

죽변 등대
폭풍 속으로 세트장
등대1길을 걸을 땐 이마에 약간의 땀이 배어날 정도로 햇볕이 따스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호된 추위는 어디로 사라진 건지 꽁무니도 보이지 않는다. 바다를 내려다보고 선 파란 지붕 뒤꼍 마당 빨랫줄에는 알록달록한 옷가지가 뽀송뽀송 말라가고 담벼락을 따라 줄지어 놓인 단지에는 안주인의 정갈한 마음이 담겼다.

대나무가 많은 길목을 벗어나면 나른한 아스팔트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좌회전하면 반듯반듯하게 지어진 빌라촌이 나오고 죽변 보건소가 보인다. 근처에 있다는 향나무가 생각나 다시 죽변 시장 쪽으로 내려왔다. 나이가 5백 살이나 되었다니 인사라도 하고 가는 게 예의지 싶다. 호떡을 파는 아주머니한테 향나무에 관해 물었다. 아, 썩은 나무요, 그녀는 향나무를 그냥 썩은 나무라고만 했다.

500년 된 향나무

온몸에 시간의 무게를 덕지덕지 얹고 선 거목(巨木). 늘어진 가지는 지지대의 도움을 받고 있었고 상처가 난 곳은 치료의 흔적이 역력했다. 향나무 옆에는 성황사(城隍祠)가 있고 동네 사람들은 이 향나무를 신목(神木)으로 받들었다. 원래 울릉도에 있던 것이 파도에 떠밀려 이곳에서 자라게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지닌 향나무에서 나이를 잘 먹은 성인(聖人)의 모습이 보이는 건 왜일까.

다시 해파랑길이다. 죽변 약국과 메디팜 약국 사이의 좁은 길을 걸었다.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오르면서부터 평범한 농로가 끝없이 이어진다. 밭 가장자리에 경고문이 붙어 있다. ‘양파 뽑아간 사람 잡히면 3년 치 배상, 멧돼지 덫을 놓았으니 남자고 여자고 발 잘려도 책임 못 진다는 문구다’ 섬뜩한 표현이지만 누군가의 땀이 도난당하는 일이 없었으면 싶다.

용호정
장백손 유허각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길, 논두렁 밭두렁 위로 봄이 돋아나고 있다. 지난해 벼를 베고 난 논고랑 흙도 토실하게 살이 올랐다. 후정 2리를 지나 마을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면 작은 개천 건너에 용호정(龍虎亭)이 있다. 이곳에 국보 제 181호인 ‘장량수 급제패지(張良守 及第 牌旨) 제단비가 있다. 이 급제패지는 고려 희종 1년(1205)에 진사시(進士試) 병과(丙科)에 합격한 장량수에게 내린 과거시험 합격증이다. 장량수는 울진의 토성(土姓)인 장씨(張氏)로 울진부원군 문성공 장말익의 8세 손이다. 용호정 아래로 눈길을 돌리면 장말익의 14대손인 장백손 유허비도 볼 수 있다.

다시 평범한 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낯선 집 마당에서 한가롭게 노니는 닭마저도 반갑다. 지금껏 바다를 낀 해변을 걸었지만 27코스는 대부분 바다를 벗어난 길이다.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며 자연 속에 온전히 묻혀 간다는 기분으로 걸어야 지루하지 않다. 있는 맛을 노력 없이 느끼기보다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새로운 맛을 찾아내는 것이 기억에 더 오래 남을 수 있다.

자연미는 사람뿐 아니라 자연에도 있다. 매정교 주변의 천변이 그러했다. 물이 흐르지 않는 개천은 갈색 풀 천지이고 봄바람이 간지럼 태우는지 끊임없이 몸을 뒤척인다. 이제 저 마른 몸에서 봄이 생산되어 나올 것이다. 마음 급한 여인은 벌써 개천 둑에 앉아 이른 봄을 캐고 있다. 곧이어 고목2리 마을 앞길에 도착했다.

옥계서원 유허비
이곳부터 부구삼거리까지는 바짝 긴장해야 한다. 차들의 통행이 잦은 반면 인도가 따로 없어 뒤통수에도 눈을 달고 걸어야 한다. 그린푸드 현장 숙소 간판 맞은편에 옥계서원 유허비(玉溪書院 遺墟碑)가 있다. 이곳은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과 석당 김상정(石堂 金相定), 만은 전선(晩隱 田銑) 선생을 함께 모신 서원이다. 원래 옥계서원은 울진읍 옥계동에 ‘사(詞)’를 세우고 우암 선생 진상(眞像)을 받들어 모셨으나 철폐되었다. 이후에 정조 1년에 죽변면에 중건되었고 순조 29년에 ‘서원’으로 승격되었지만, 이후에도 이건 되고 중건되고 철거되고 낡아서 허물어지는 과정을 겪다가 2005년에서야 지금의 위치에 비각이 세워졌고 매년 음력 3월16일에 제사를 지낸다.

수수한 길 끝에 원자력발전소가 보이고 드디어 오늘 마지막 코스이자 해파랑길 경북 구간 최
▲ 글 사진=임수진 작가
종 목적지인 부구교다. 이번 코스 대부분이 치장하지 않은 평범한 얼굴이다. 페르소나에서 자유로운, 그래서 마음이 편했다. 가끔 사는 게 힘들면 길 위에 서 보는 것도 괜찮지 싶다. 과거와 현대의 시공간이 어우러져 동해안의 숨결이 된 길. 그 길을 걷다보면 얇아서 찢어질 것 같은 의욕에 새살이 돋고 지친 마음은 재생이 된다. 자연만큼 믿음직한 주치의가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끝>

이것으로 작년 4월 경주 하서항에서 시작된 해파랑길 경북 구간에 마침표를 찍는다. 지난 1년 동안 동해안 여행에 동참해준 독자들께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린다.

□근처 둘러볼만한 곳

△덕구 온천


삼척 방향으로 올라가다 부구 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면 덕구온천 가는 길이다. 태백산맥 동쪽 응봉산 중턱에 자리한 덕구온천은 국내 단 한 곳밖에 없는 자연용출온천이다. 데우거나 식히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42.4℃ 온천수에는 칼륨, 칼슘, 철, 탄산, 중탄산염이온마그네슘 등 몸에 이로운 광물질이 많이 함유돼 있다. 덕구온천은 국민보양온천으로 지정됐다. 온천수의 성분과 온도, 주변 환경과 내부 시설 등이 건강 증진과 심신 요양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주소 경북 울진군 북면 덕구온천로 924

전화 : 054-782-0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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