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굴복 않고 세상 개혁에 앞장 선 이상룡 선생 정신 깃들어

임청각 군자정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절 기념사에서 안동 임청각을 ‘유서 깊은 집’이라며 “임청각의 모습이 바로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대한민국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임청각은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자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해낸 고성 이씨 종택이다.

임청각은 고성 이씨의 600년 명문 종가로 우리의 진실한 역사를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긴 가문이다. 석주 이상룡(1858~1932)은 17대 종손이다. 석주 이상룡의 삶은 집안 선조들이 남겨놓은 정신적 가르침이 토대가 되고 있다.

이 집안에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밝히는 ‘단군세기’와 ‘태백일사’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임청각 앞 일제가 놓은 철길리 가로막고 있다.
고성 이씨 제9세인 행촌 이암은 ‘단군세기’를 저술하여 단군의 사적을 전하고 민족혼을 고취했다. 그의 현손인 이맥은 ‘태백일사’를 편찬해 고성 이씨 가문에 비밀리 간직하여 이어져 오게 된다. 석주 이상룡은 신흥무관학교에서 자신이 집필한 ‘대동역사’를 교재로 사용해 잃어버린 옛 역사를 되찾고 대한민국의 바른 역사를 세우는 데 힘썼다.

이러한 저술들은 600여 년 동안 보전하려는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는 근조선 왕권과 일제하에서도 그 책들이 보전돼 왔다.

현재 진행 중인 고성 이씨 종택 임청각의 원상회복과 함께 이 가문에 의해 지켜진 우리 역사의 진실을 담은 역사서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져, 고성 이씨 가문을 포함한 역사독립운동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꿈과 바램도 결실을 보길 기대해 본다.

고려말기 최고의 명필로 알려진 행촌 이암의 화엄경 필사본 서첩
△임청각 고성 이씨의 군자정신.

고성 이씨 문중은 역사의 격변기마다 수많은 시련을 겪어왔다. 특히 행촌 이암은 고려 때 5명의 임금을 섬기는 동안 유배와 은둔을 거듭했다. 그의 손자 이원은 임금에게 직언을 올리다가 유배를 가기도 했다. 이원의 아들 이증(李增·1419~1480) 역시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혼란한 정국을 뒤로하고 안동에 정착해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이증의 둘째 아들 이굉과 셋째아들 이명도 갑자사화 당시 영해와 영덕에 각각 유배되었다가 안동으로 와서 귀래정과 임청각을 세우고는 함께 만년을 보냈다.

이처럼 고성 이씨는 고려와 조선을 거쳐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유배와 은둔생활을 거듭해왔다. 그런데도 시대적 현실을 좌시하지 않고 의리와 명분으로 맞서면서 세상을 향한 개혁 의지를 표출해왔다. 이는 고성 이씨 문중이 추구해왔던 군자로서의 삶이었다.

단군세기
△민족의 역사를 지키다

민족의 기원을 찾으려는 고성 이씨 가문의 역사관은 뿌리가 깊다. 석주 이상룡의 독립운동도 선조로부터 흘러내러 오는 역사의식이 바탕이 되고 있다.

‘환단고기’는 위서 시비가 있기는 하지만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단군 세기’는 고려 말 국무총리격인 ‘행촌 이암’의 저서이고, ‘태백일사’는 이암의 현손인 ‘일십당 이맥’이 조정의 사고(史庫)의 정확한 자료를 토대로 저술한 역저들이다. 이들 역사서는 고성 이씨 문중의 가학(家學)으로 할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그 아들에게 은밀하게 전해 내려왔다.

단군세기와 태백일사 등 4권의 고대 사서들을 합하여 한 권으로 엮은이는 고성 이씨가 아니라 운초 계연수(1864-1920)이다. 계연수가 고성 이씨 집안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성 이씨 해학 이기(1848-1909)와의 만남이었다. 1897년 이기의 문하에 들어간 계연수는 1909년 스승이 한·일합방에 비분해 절식 자진하자, 1911년 스승의 유작인 환단고기 초간본 30권을 발행했다. 일제는 ‘환단고기’ 대부분을 압수해 불태웠고 계연수는 1919년에는 석주 이상룡의 휘하에 들어간다. 그는 다음 해 8월 밀정에게 잡혀 살해당해 시신은 압록강에 던져지고 배달의숙과 서적 3000여 권 원고들은 불에 타 없어지게 된다. 이때 압록강에서 토막 난 스승의 시신이 수습되는 자리에는 14세의 소년 이유립이 있었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환단고기’가 고성 이씨 이유립을 통해 1979년 다시 한 번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석주 이상룡의 역사관

석주 이상룡은 한국사의 무대는 한반도가 아니라 만주라고 인식했다. 그는 퇴계 이황과 학봉 김성일의 학통을 이은 정통 유학자였지만 사상적 근간은 집안 대대로 내려온 ‘역사관’이 깔려 있다. 당시 김교헌, 박은식 등 독립운동에 나섰던 대다수 독립운동가도 같았다.

그는 1911년에 쓴 망명일기 ‘서사록’(西徙錄) 등에서 “만주는 우리 단군 성조의 옛터이며, 항도천은 고구려 국내성에서 가까운 땅임에랴? 요동은 또한 기씨(기자)가 봉해진 땅으로 한사군과 이부의 역사가 분명하다”고 적고 있다.

한 세기 전의 조선총독부나 지금의 중국 동북공정은 모두 고대 한나라의 식민지였다는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북부로 비정하는 것과 대조된다. 이는 시진핑이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고 망언한 근거이기도 하다.

윤용섭(전 한국국학진흥원 부원장) 박사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 사대주의자에 의해 우리의 실제의 역사와 방대한 기록들이 연기처럼 사라졌다”며 “역사를 잃어버린 우리 동포들에게 고성 이씨 가문은 참으로 큰 선물을 남겨 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은 서경, 시경 등 당대의 역사를 소상히 기록하고 있으나 우리는 반만년 역사 중 개막기 2000년의 역사를 밝히는 단군세기를 포함하는 ‘환단고기’라는 역사책이 세상에 나왔는데 이 책에 대해 위서 논쟁으로 그 가치를 일소하는 것은 역사를 보는 시야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오종명 기자
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안동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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