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길 선생
대구 출신 애국지사 김상길 선생이 92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23일 대한광복회는 김 선생이 지난 22일 숙환으로 숨졌다고 밝혔다.

김상길 선생이 숨을 거두면서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에 참가한 애국 지사 중 대구 출신으로는 장병하·권중혁 지사가, 경북에서는 배선두 지사만 생존해 계신다.

김 선생은 대구상업학교 재학중인 1942년 5월 동교생인 이상호·서상교 등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항일학생결사 태극단을 조직했다. 태극단 명칭은 한말이후 사용된 태극기를 상징하는 것이며 약칭으로 t.k.d가 사용됐다.

당시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도발, 마지막으로 발악을 하던 시기로 우리나라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더욱 가혹하게 진행했다. 김 선생 등은 일본군 입대 반대 등 일제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면서 독립정신을 높였다. 또한 조직확대를 위해 동지포섭 활동에 주력했다. 그 결과 1943년 4월 김정진·이준윤·이원현·윤삼용 등을 동지로 영입, 학교단위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같은해 5월 그동안 가입한 단원을 포함해 전원이 대구 앞산 비파산 약수터에 모여 결단식을 가졌다.

태극단 조직은 크게 일반·특수 조직으로 나눴으며 최고의 의결기관으로서 간부회의를 구성했다. 일반조직은 다시 육성부 밑에 관방국·체육국·과학국 등 3국을 뒀다. 그 밑에 군사부·항공부 등 10여부를 둬 체계화했다. 특수조직은 건아대라 칭하며 중학교 1·2학년생과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을 대원으로 가입시켰다. 이들을 향후 단원으로 육성하는데 주력했으며 김 선생은 관방국장 일을 맡아 태극단 일반사무 등을 주로 담당했다.

태극단의 투쟁방략은 조직확대를 통해 전국 학교와 각 지역별로 조직을 완성한 후 여론을 환기 시키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펼쳤다.

하지만 1943년 5월 배반자의 밀고로 태극단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됐으며 김 선생은 학교에서 수업도중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단기 5년, 장기 7년형을 받았다.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감옥에서 나왔다.

정부는 김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유가족으로는 아들 영남·영진·용준 씨가 있으며 빈소는 분당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이다. 발인은 24일 오전 8시,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이다.

김현목 기자
김현목 기자 hmkim@kyongbuk.com

대구 구·군청, 교육청, 스포츠 등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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