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오른쪽과 왼쪽을 구분해 행동한다. 좌우 구분은 오른손 왼손, 오른발 왼발 등 극히 원초적이며 생태적인 속성에서 비롯되지만 시대에 따라 당대의 지배관념이 투영되기도 한다.

조선 시대에는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좌도와 우도, 산과 바다를 기준으로 전라좌도와 우도로 지리적 구분을 했다. 국가정치제도에서는 왼쪽 선호현상이 두드러졌다.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았고, 문관은 왼쪽, 무관은 오른쪽에 자리했다. 좌우는 동서를 의미했기 때문에 문관은 동반, 무관은 서반으로 불렀다.

장례 풍습에도 모친이 돌아가셨을 때는 상복의 오른쪽 어깨, 부친이 세상을 떴을 때는 왼쪽을 드러내는 등 주자가례에도 없는 좌우구분이 있다. 우리 옷은 ‘우임’이라 해서 왼쪽 옷을 오른쪽 옷 안쪽으로 여민다. 옛날부터 중국에서는 좌임을 오랑캐 법도로 보았다. 양복은 좌임으로 현대인은 서양 오랑캐 옷을 입고 사는 셈이다.

근대에 들어와 서구문화가 들어오면서 좌우 개념의 일대 혼란을 가져왔다. ‘라이트(우)’는 선이고, ‘레프트(좌)’는 악 이라는 미국식 가치관이 들어온 것이다. 특히 남북 간의 치열한 대립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우나 좌의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측면이 강하다. 사회제도와 관념이 지나친 구분과 차별을 낳고 있는 것이다. 좌우 어느 한쪽을 선호 한다는 것은 한때 유행이나 시대조류와 같은 것으로 편견이다.

제사를 치를 때 위패의 위치 또한 중요하다. 조선 숙종 2년(1676년) 퇴계 이황을 모신 안동 호계서원에 제자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을 추가 배향하면서 누구의 위패를 윗자리인 왼쪽에 놓아야 하는지를 두고 다툰 이른바 병산서원과 호계서원 간의 병호시비(屛虎是非)가 400년이나 이어졌다. 이 역사적 시비는 지난 2013년에야 문중과 후학이 ‘좌 서애 우 학봉’으로 하기로 결론을 냈다.

호계서원은 원래 90칸 건물을 자랑했는데 대원군 서원철폐로 없어졌다가 1878년 강당만 건축됐다. 이후에는 안동댐 건설로 1973년 임하댐 아래로 옮겨졌다. 안동 국학진흥원이 50억 원을 들여 진흥원과 가까운 곳에 터 잡아 호계서원을 규모 있게 다시 짓기로 했다고 한다. 경북 선비정신의 대표적 건축물을 복원하는 의미가 크다.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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