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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창우 안전사회시민연대 대표
부산의 일본영사관 근처에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건립하는 문제를 두고 경찰과 노동자·시민 사이에 실랑이가 계속되고 있다. 시민 10여 명이 다치기까지 했다.

외교부는 영사관 앞에 징용상을 세우면 외교적으로 문제가 생긴다는 이유로 반대 의사를 밝혔고 경찰은 정부의 방침에 따라 영사관 근처 징용상 건립을 무산시키려 했다. 현장의 시민들은 크게 분노했다. 많은 국민도 ‘왜 정부는 일본 정부 눈치를 그렇게 보나’ 하고 묻고 있다. 경찰이나 외교부는 나름의 고충이 있겠지만, 물리력과 강압으로 막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2004년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등에관한특별법’이 제정될 때까지 징용 피해자에 대한 진상규명도 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일본에 피해 보상 요구도 하지 않았던 정부다. 정부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인정부터 해야 한다. 나아가 징용상 건립 움직임에 협조, 협의하는 것은 물론 진상 규명과 배·보상을 위해 적극 나서겠다고 다짐하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순리 아닌가 싶다.

일제 강점기 이전과 강점기 동안 자신이 범한 전쟁범죄에 대해 사과하고 합당한 배·보상을 해야 함에도 일본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넘어갔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강제 징용, 강제 징병, 원폭 피해자, 사할린 동포 귀환과 배상 문제는 해결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어떻게 나오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안다. 어정쩡한 모습을 보이는 문재인 정부의 태도에 대해서도 모두가 알고 있다. 강제징용 문제는 1965년 청구권 협상이 완료되었다는 이유로 일본 정부는 물론 한국 정부도 꺼내기를 꺼려하는 문제다. 강제 징병과 원폭 피해자 문제, 사할린 동포 문제는 문제로 떠오르지도 않고 있다.

일제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하면서 징용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돈 벌게 해주겠다고 속여서 끌고 갔고 전쟁이 격화되면서부터는 강제 동원을 본격화했다. 소년·소녀와 청년들을 포함한 조선인들은 일본은 물론 사할린, 쿠릴열도, 남양군도 등지로 끌려가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면서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하고 터무니없이 낮은 임금조차 제대로 받은 사람이 없다. 노예보다 못한 삶을 강요받았다.

12, 13세의 어린 소녀들도 징용 대열에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인 교장이 돈도 벌고 상급학교도 진학시켜 주겠다고 속여 징용 길에 내몰았다. 뒤늦게 알아차린 부모가 ‘결사반대’에 나섰지만 무력을 앞세운 조선총독부의 협박과 강압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다.

역사학자 강만길에 따르면 일제 때 강제 동원된 조선인 숫자가 최소한 600만에 이른다. 2003년 남북학술 토론회에서 북한의 이천홍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사가 밝힌 바에 의하면 일제 때 동원한 조선인 숫자는 총 840만 명에 이르고 징용된 숫자만 609만 명이다. 일제강제동원역사관 자료에 따르면 일제가 동원한 조선인 수는 최소 782만7355명(중복 포함,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제외)에 이른다.

남북 정상회담으로 남북화해와 평화의 길이 열리고 있다. 원치 않은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직간접으로 경험한 8000만 겨레는 보수 진보, 나이 성별에 상관없이 평화를 원한다. 평화 실현의 방법이 다를 뿐 평화 자체를 거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처럼 일어나는 평화의 기운을 살려 남북 간에 여러 방면에 걸쳐 협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

일제의 강제 동원에 대한 조사 자료와 통계를 공유하는 게 필요하다. 또한 진상규명을 공동으로 하는 문제를 하루 빨리 의제에 올려서 징용을 포함한 강제 동원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일본 정부에 공동 대처해야 한다. 남북이 함께 일본 정부에 진상규명에 협조할 것을 요구하는 게 필요하다. 한 분이라도 더 살아 계실 때 진상규명과 배·보상을 해야 한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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