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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사랑이 인간됨의 핵심이라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밖에 난 몰라’, ‘사랑은 눈물의 씨앗’,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사랑의 미로’, 노래방 가이드북을 보면 사랑이 들어간 노래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사랑이 우리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말입니다. 소설론에서 진반농반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껏 있어 온 이야기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뭉뚱그려 본다면?”이라고 묻고 “인간은 왜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가이다”라고 답하는 것입니다. 그 말 이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모든 이야기를 한꺼번에 다 묶어낼 수가 없다는 것인데 곰곰 생각해 보면 과연 일리가 있습니다. 이야기 문학의 필수 요소가 인간들끼리의 갈등인데 그것이 결국은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드물지만 인간과 동물 사이의 갈등도 상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동물의 캐릭터가 인간화되거나(거의 산신령 수준의 호랑이 등) 아니면 그것을 둘러싼 인간들의 갈등(외세와 토속의 대립 등)이 첨예하게 부각됩니다. 결국 모든 이야기는 “왜 서로 사랑 못해?”를 전할 뿐입니다.

사랑에도 종류가 아주 많습니다. 인류애, 민족애, 동료애, 가족애, 모성애, 부성애, 이성애, 동성애, 성애(聖愛), 성애(性愛)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중에서 문학이 즐겨 다루어온 것이 성애(性愛)입니다. 서양말로 에로티즘이라고 합니다. 보통 문학이 다루는 에로티즘은 보편적 실재(생명현상)와 자기 자신(개체)을 이어주는 연속성에 대한 강한 본능적 추구가 될 때가 많습니다. 가치 있는 존재로서의 삶을 보장해 주는 결정적인 수단이 될 때도 많고요. 그 정도로 절실해야 문학으로 인정합니다. 작품 속의 성격이나 사건들이 그렇게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만약 그런 절실한 묘사나 세계관의 등장 없이, 성애만 적나라하게 그린다면 예술이 아니라 외설이 됩니다. 서양말로 포로노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학 에로티즘에서는 단순한 생식 욕구나 성행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기 구원을 이루려는 모험적이고 도전적인 인간의 모습이 중요합니다. 한 인간이 자신의 불연속적 존재양식을 그것을 통해 뛰어넘으려 한다는 구체적인 정황이 절실하게 묘사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과하면 부작용이 따릅니다. 생명력의 표상인 에로티즘이 종종, 역설적으로, 죽음과 연결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을 두고 ‘에로티즘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다’라고까지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말도 아닙니다. 그쪽으로 과하게 나가다 보면 죽음만이 영원한 ‘연속’이라는 철학적 각성(?)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정도까지 나가는 것은 별로 득이 될 게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문학을 하고 예술을 하는 것이, ‘뜨겁게’ 함께 잘살아보자는 취지에서 생명력의 고양을 꾀하는 것이지 죽어 싸늘하게 식어서라도 꼭 자기 해체의 충동과 망집을 이루기 위해서는 절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들어서 정치도 예술이고 에로티즘이라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노벨상은 트럼프 대통령이 받고 우리는 평화만 가지면 된다”라는 문 대통령의 말씀이 여느 노벨상 수상작보다 훨씬 문학적입니다. 최고의 문학성, 최고의 ‘생명력 고양’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왜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가”라는 오래된 문학적 질문에 명쾌한 답을 줍니다. 혹자는 ‘준비된 말씀’이 아니었겠느냐고, 그래도 너무 좋았다고, 말합니다. 글쎄요,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준비’는 마음이나 시간에 여유가 있을 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에게 과연 일말의 여유라도 있었던가요? ‘자기 해체의 충동과 망집’에 사로잡힌 자들에게는 행여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진정 사랑하고자 했던 이들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습니다. 오직 평화, 그 절실함만 있었을 뿐입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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