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천 년 한민족 역사의 '첫 쇳물' 21시간 만에 감격의 눈물로 터져

마침내 쇳물을 쏟아내는 포항제철소 1고로.
1) 오천 년 한민족 역사의 ‘첫 쇳물’

1973년 6월 9일. 대한민국에서 용광로를 통해 첫 쇳물이 쏟아지던 날.

사실은 그 쇳물보다 그 역사적인 현장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사람들의 눈물이 먼저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첫 출선(出銑)은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 30분에 이뤄졌다. 박태준 사장을 비롯 제철소 전 임직원은 시뻘건 쇳물을 보자마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불렀다.

물론 며칠 전부터 피 말리는 준비작업이 착착 진행되었다.

포항제철소 1고로 화입행사(1973)
6월 7일 제철소 본관 앞 광장에서 박태준 사장은 태양열로 고로에 화입(火入)할 불씨를 채화하여 보존했고 6월 8일 7명의 불씨 봉송 주자가 이 불을 제선공장으로 봉송하였으며 오전 10시 30분 고로화입식을 거쳐 1고로에 화입했다.

그래서 이 역사적인 첫 쇳물은 불씨를 고로에 넣은 후 약 21시간 만에야 터져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대형 고로에서 쇳물이 터져 나오자 고로주상을 가득 메우고 쇳물이 나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박태준 사장과 건설요원들은 모두 감격의 환호성부터 내질렀다.

현장의 건설요원들은 눈으로는 출선구에서 빠져나와 흘러가는 그 황금빛 쇳물을 한눈 가득 담고 있었는데 그동안 39개월이 넘는 공사 기간 동안 겪은 수많은 사연도 모두 쇳물에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박태준 사장은 1고로에 불을 지펴 넣고 다음 날 쇳물이 나오기까지 스물한 시간 동안 태어나서 가장 긴 하루를 보냈다. 다음 날 아침엔 정말 ‘우향우’를 해야지 않는가 하는 초조감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고로에서 쇳물이 나오지 않으면 영일만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각오를 한 지가 이미 오래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은 포항과 포항제철소를 도왔고 마침내 쇳물은 눈물과 범벅이 되어 출선구로 콸콸 흘러나왔다.

포항제철소에서 첫 쇳물이 쏟아져 나온 1973년 6월 9일. 이날을 기념해 오늘날 ‘철의 날’은 6월 9일이 되었다.

첫 출선 순간에 만세를 부르는 박태준 사장과 임직원들(1973)
2) 우향우냐, 만세냐? 쉽지 않았던 첫 쇳물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용광로, 1고로는 호락호락하게 쇳물을 내어주지 않았다.

오전 7시 30분 출선 예정시간을 앞두고 현장요원들은 새벽 5시에 시험 출선을 시도했다.

그러나 출선구를 뚫기시작면서 경험부족으로 장비를 잘못 투입해 출선구를 성형할 때 묻어놓은 80㎜ 구경의 파이프를 손상시켜 첫 번째 개공작업은 실패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벽두께가 2m나 되는 출선구를 급하게 산소불로 녹여서 뚫어야 했다. 그런데 산소개공을 시작한 지 한 시간이 넘어도 쇳물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새벽부터 첫 출선을 보려고 모여든 임직원들은 어느새 주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 제철소내 전력 인입공사.

이에 노전반원들은 그동안 일본연수를 통해 지금껏 쌓아온 기술을 총동원해 구멍 뚫기에 안간힘을 쏟았다. 거의 2시간 동안의 사투가 벌어졌고 마침내 예정된 7시 30분께 출선구가 ‘펑’하는 소리와 함께 뚫리면서 시뻘건 쇳물이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쇳물 생산이 이뤄졌지만 초기 조업은 매우 어려웠다.

용광로를 빠져나온 쇳물은 대탕도를 흘러가면서 비중 차에 따라 슬래그는 상부로 떠오르고 용선은 아래로 흐르다가 분리된다. 그런데 힘들게 출선이 이루어진 후에도 초기에는 쇳물의 온도가 조금 낮아지고 규소(Si) 성분이 높아 유동성이 나빠지면 위로 떠오른 슬래그는 흘러가지만, 하부로 흐르는 쇳물은 바닥에 자꾸 침착돼 가라앉기 때문에 각목으로 옆에서 그 지점을 계속 문질러 주어야만 했다.

1기완공을 앞두고 현장에서 수거한 고철을 운반하는 새살림 부인회 회원들
당시 제철소에 와있던 일본기술지도 자문단 권유에 따라 6~7일 주야 근무체제로 이 작업에 매달리다 보니 현장 근로자들은 모두 손에 물집이 잡히면서 탈진 상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직 기술적 노하우가 확보되지 않은 당시에는 그 수작업을 멈출 수 없었다. 일본 기술요원들은 노전(爐前) 작업이 고열의 힘든 작업임을 감안해 4조 3교대로 할 것을 제안했다. 결국 당시 근무체계는 3조 3교대지만 고로 노전조업반은 4조3교대를 실시하기로 하고 필요한 인력을 사내에서 급하게 모집하기도 했다.

1972년10월3일 열연공장 준공(1972)첫 열연제품에 박태준 사장이‘피와 땀의 결정체’라고 쓰고 있다 7.4 남북공동성명 발표1972년 10월 3일 포스코는 1기 건설의 핵심설비 중 하나인 열연공장 준공테이프를 끊었다
3)종합 준공을 향한 숨 가쁜 일정들 ‘착착’

1970년 4월 1일 제철소 1기 종합착공 이후 건설공사는 제철소 전 영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로부터 39개월, 1기 준공을 앞두고 공사현장은 전시상태나 다름없는 비상국면이었다.

설비 증설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확장공사를 하는 가운데 조업을 하는 일면조업, 일면건설의 상황이었다. 건설공사를 차질 없이 진행함과 동시에 완벽한 조업을 지속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오로지 전진뿐이었다

1972년 10월 3일 1기 건설의 핵심설비인 열연공장 준공테이프를 끊었다. 연간 62만 2000톤의 슬래브를 처리하여 열연코일 18만3000톤, 박판 22만 톤, 대강 18만톤 등 58만3000톤의 완제품을 생산할 공장이다. 박태준 사장은 첫 열연제품에 ‘피와 땀의 결정체’라는 기념 휘호를 쓰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피와 땀, 이것은 흔한 수사가 아니었다. 2개월 동안의 철야 돌관작업을 통해 5개월 지연된 공기를 따라잡았던 1971년 가을의 열연 비상, 그 고투를 담은 말이었다.
1고로 건설현장 항공사진(1972)
1973년에 들어서면서 1기 종합준공에 앞서 관련 설비들이 속속 준공되었다. 1월에는 급배수설비와 시험검정설비를 준공한 데 이어 3월에는 항만하역설비와 증기설비, 수배전설비등을 준공했고 4월에는 공작정비공장, 구내수송설비, 원료처리설비, 코크스공장, 산소공장을 준공하였으며 5월에는 소결공장, 석회소성공장, 철도설비, 발전송풍설비가 준공됐다.

첫 원료선 아잔타호의 포항항 입항 환영식.
철판을 생산하기 위한 원료도 속속 도착했다. 3월 2일에는 호주산 원료탄을 적재한 아잔타Ajanta)호가 포항항에 입항하였고 4월 14일 철광 석1차선 월드뉴스World News)호가 호주광을 싣고 포항항에 입항함으로써 고로 조업을 위한 준비를 완료했다. 5월 22일에는 고로침목을 쌓음으로써 화입준비를 마쳤다
23CM완공된 포항 1고로 전경(1973) 뒤에 형산강이 보인다.
6월에 들어서 8일 쇳물이 흘러나올 제선공장 ,제강공장 그리고 분괴공장 및 강편공장을 준공함으로써 10개 공장 12개 설비 모두가 시험조업에 돌입했다.

□보험 리베이트로 ‘제철장학회’ 설립

제철장학회 설립포항제철 유치원 개원.(1971)
오늘날 포스코교육재단의 모태인 ‘재단법인 제철장학회’는 우연찮게 설립되었다.

종합제철 1기 공사가 한창이던 1970년 가을. 박태준 사장은 밝은 표정으로 임원회의를 열었다. “우리 맘대로 쓸 수 있는 큰돈이 생겼다. 이걸 어떻게 쓰는 것이 좋겠어?” 하고 임원들에게 물었다.

사실인즉, 포항종합제철은 1기 설비 구매과정에서 설비에 보험을 들었는데, 보험사로부터 17만달러(당시 한화로 6000만원) 이라는 거금의 리베이트가 들어온 것.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산업재해나 설비사고에 대비한 보험이었는데 거의 사고 없이 한 해를 보내자, 보험회사가 리베이트를 제공한 것이다.

박 사장은 며칠을 고민하다 청와대에 대통령 접견을 신청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가지고 가서 경위를 설명하고, 국정에 유용하게 쓰는 것이 좋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통령은 공식적인 리베이트니 회사에 적절하게 사용하라고 답했다.

결국 돈의 용처를 두고 임원회의에 안건으로 올라왔고 이날 회의에서는 직원들의 꿈이 “나는 못 배웠어도 아들·딸만은 원 없이 교육시키고 싶다”는 많다고 판단 장학사업에 대한 건의가 압도적이었다.

박태준 사장은 좋은 생각이라고 했고, 바로 제철장학회 창설 작업에 들어가 결국 1971년 1월, 포스코 직원 자녀들을 위한 장학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포스코교육재단>의 모태인 재단법인 제철장학회가 출범하게 됐다.

□공사 중이던 제철소 제품부두에 거북이 출현

막걸리마시는 거북이.

1972년 9월 4일, 개항을 앞두고 있던 포항제철소 제품부두에 길이 1m 30cm, 무게 30kg의 거북이 나타났다. 거북을 발견한 것은 작업 중이던 직원들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곧 이 커다란 거북을 어찌할 것인지 고민에 빠졌다. 논란 끝에 바다로 돌려 보내기로 결정했다. 부두직원들은 일단 암벽 위에 거북이를 모셨다. 소문은 금방 온 제철소 안에 퍼졌다. 사람들이 막걸리를 사 들고 모여들었다. 제품부두의 개항을 축하하기 위해 먼 곳에서 행차한 거북이에게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는 것. 어느새 제품부두는 잔치 분위기로 변했고 거북이에게 막걸리

를 한 잔씩 권했고, 거북이는 막걸리까지 몇 잔 들이켜더니 긴 트림까지 했다.
▲ 이한웅 작가·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기념촬영을 하고 바다에 놓아주자 바다 멀리 사라졌는데 직원들은 이 일을 “제품 부두가 거북의 긴 수명처럼 오래오래 빛날 징조”라며 기뻐했다. 13년 후인 1985년 외항공사 때에도 부두에 거북이가 나타나자 직원들은 길조라며 다시 제사를 지내고 회사의 번창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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