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놀러오고 신선이 살던 곳 석천계곡 둘러 보면 감탄이 절로

▲ 석천계곡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석천정사 전경.
한국의 3대 오지를 BYC로 표현한다. B는 봉화, Y는 영양, C는 청송이다. 지금은 교통이 많이 좋아졌지만, 옛날에 BYC를 가려면 정말 산 넘고 물 건너가야 했다. 날씨가 더운 요즘, BYC에는 아직 시원한 계곡과 산 등 갈만하고 볼만한 곳이 많다.

내성천이 흐르는 봉화는 어느 지역보다 고택과 정자들이 많이 남아 있다. 시원한 계곡과 고택을 볼 수 있는 길이 ‘봉화 솔숲갈래길’이다. 총 4개 구간 126㎞에 이른다. 일종의 봉화 둘레길인 셈이다. 전체 코스 중 제1구간 내성천에서 석천정사를 거쳐 닭실마을과 추원재까지 3.8㎞를 걷는 길이 절경이다. 마을과 계곡, 들길을 걸으며 봉화 역사의 단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닭실마을 백미인 청암정
일반 방문객들은 닭실마을에 오면 충재고택과 청암정만 보고 석천정사는 지나치기가 쉽다. 그만큼 석천정사는 마을과는 떨어진 외딴곳에 있다.
닭실마을 입구 표지석
봉화 닭실마을(酉谷)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전통 마을 가운데 하나이다. 마을 이름은 지형이 ‘금계포란’(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세)의 천하 명당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경주 양동마을, 안동 내앞마을, 풍산 하회마을과 더불어 삼남의 4대 길지(吉地)로 꼽았던 곳이 바로 봉화 닭실마을이다. 마을을 감싼 부드러운 산세와 기와를 쓴 집들, 그리고 너른 들판이 어우러진 모습이 감동적이다. 과연 천하명당이란 말을 허투루 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특히 석천계곡은 닭실마을 가는 옛길로 정자와 계곡, 솔숲이 어우러진 멋진 풍경을 자랑한다.

봉화 솔숲갈래길은 닭실마을을 만날 수 있는 가장 느린 길이다. 시간은 걸리지만 차분하게 마을의 다양한 면모를 감상할 수 있다. 닭실마을은 충재 권벌(1478~1548)을 중심으로 한 일족의 집성촌이다. 충재 선생의 본관은 안동으로 1507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 삼사, 승정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이다.

봉화 솔숲갈래길 출발점은 봉화읍 내성천 앞에 위치한 봉화체육공원이다. 내성천은 낙동강 지류 중 하나로 봉화 오전리 선달산(1236m)에서 발원해 봉화, 영주, 예천 등을 적시며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봉화체육공원 앞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걷기가 시작된다. 솔숲갈래길을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에는 총 4개 구간이 있지만, 외부에 잘 알려진 곳은 1구간이다. 징검다리 건너 천변을 따라 내려간다. 계속해 내성천 봉화교 아래를 지나고, 철길 만나는 지점에서 강을 건넌다. 다리를 건너면 삼계교차로 앞이다. 여기서 도로따라 조금만 가면 만나는 삼계교에서 석천계곡이 내성천에 몸을 맡긴다.

다리 건너 오른쪽으로 돌아 큰길을 따라간다. 이 길이 원래 닭실마을 가는 길이었다. 마을로 진입하는 길이 이렇게 운치 있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석천계곡과 닭실마을 일대를 사적 및 명승 제3호로 지정했다가 2010년 10월에 석천계곡과 청암정 일대를 새로 명승 제60호로 지정했다.
초서체로 쓴 청하동천(靑霞洞天)
길은 오솔길로 바뀌고, 길 옆 암반에 초서체로 ‘청하동천(靑霞洞天)’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충재 권벌의 5대손 권두옹이 쓴 글씨로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옛날 석천계곡에는 도깨비들이 찾아와 놀았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석천정사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호소하자 이에 권두옹이 바위에 청하동천이란 글자를 새기고 주서(朱書) 칠을 해 필력으로 내쫓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아직 주서 칠 흔적이 남아 있다. 아름답긴 아름다운 계곡이었던 모양이다. 신선이 노닐던 계곡을 도깨비들이 탐내서 놀이터로 알고 설쳤을 정도이니 말이다. 초서로 쓴 글씨도 도깨비같이 생겼다.

솔숲 사이를 천천히 걷노라면 계곡 건너편으로 그림 같은 건축물이 눈에 들어온다. 충재 권벌의 큰아들 청암(淸岩) 권동보(權東輔·1517-1591)가 1535년에 세운 석천정사(石泉亭舍)다. 소나무, 물길, 정자, 나무 징검다리가 어우러진 모습이 일품이다.

권동보는 중종 37년인 1542년에 사마시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랐다. 명종 2년인 1547년에 ‘양재역벽서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아버지가 평안북도 삭주로 유배돼 1년 만에 죽자, 관직을 버리고 20년 동안 두문불출했다. 선조 때 아버지의 무죄가 밝혀져 복관됐지만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鄕里)에 돌아와 전원의 계곡 위에 석천정사를 짓고 산수를 즐기면서 여생을 보냈다.

석청정사는 울창한 소나무 숲에 싸여 있다. 정자는 계곡에 면한 원래 지형을 최대로 살려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지어졌다. 계곡 옆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마루는 완전히 개방된 형태가 아니라 판장문(板牆門)을 두어 필요에 따라 문을 여닫아 공간을 폐쇄하기도 해 자연과 소통할 수 있게 했다.
석천정사 현판


문을 열면 계곡 풍경이 그대로 들어온다고 한다. 선경이 따로 없다. 석천정사(石泉精舍) 현판은 조선중기 문신이자 서예가인 송재 송일중(松齋 宋一中·1632-1717)의 글씨다. 추녀 끝에 있는 수명루(水明樓·물 맑은 행실과 덕행을 후대에 퍼트림)와 계산함휘(溪山含輝: 시내와 산이 빛을 머금음)는 철종 때 경상도 관찰사와 공조판서를 지낸 송벽 이정신(李正臣: 1792-1858)의 글씨이다. 석천정사 안 자연석 벽면에 石泉亭(석천정)이란 글자를 새겨놓았다는데 아쉽게도 문이 잠겨있어 볼 수 없었다.
석천정사 앞 나무징검다리
다리는 모가 나지 않고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나무다리다. 그것도 암반을 기반으로 두 개를 자연스럽게 연결해 놓은 것이 정겹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길이 있을까? 신선이 된 듯하고, 선녀가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다. 경치도 경치지만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공기가 청아하다. 시원한 한 줄기 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지나가는 것이 선경에 들어온 느낌이다. 커다란 너럭바위, 깨끗한 자갈과 모래, 그리고 수정같이 맑은 계류는 정사에서 살았던 동보(東輔)의 선비정신이 투영되면서 역사의 향기가 잔잔하게 전해진다.

노송 사이로 펼쳐진 석천정사 본제(本第·살림집)인 고택으로 길을 잡는다. 석천정사와 석천계곡은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천하의 명당자리로 되돌아가는 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현재의 닭실마을은 봉화읍에서 울진 방향으로 가는 국도에서 진입하게 돼 있지만, 예전에는 충재의 위패를 모신 삼계서원(三溪書院)이 있는 삼계리에서 올라오는 길이 주 진입로였다고 한다.
석천계곡 징검다리
석천정사를 시제로 지은 시구(詩句)가 새겨진 시비(詩碑)를 지나 큰길을 마다하고, 왼쪽 징검다리를 건너 올라서면 너른 들판이 나오고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한 폭의 동양화다.

들판을 에둘러 가도록 만든 도로를 걸어 도착한 곳이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충재박물관이다. 박물관은 안동 권씨 충정공파 집안의 유물들을 전시한 곳이다. ‘충재일기’와 ‘근사록’을 비롯해 보물로 지정된 집안의 고서적, 고문서들이 가득하다.
청암정 전경
청암정 안에 걸려 있던 퇴계 이황이 지은 ‘청암정제영시’ 와 석천정사에 있던 권동보가 지은 ‘제석천정사’ 편액과 현판을 이곳에 옮겨 보관하고 있다.

박물관을 나오면 마을을 구경할 차례다. 마을에는 35가구 70여 명이 살고 있다. 마을 이름은 ‘닭실’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경상도 사투리인 ‘달실’로 부른다. 그래서 본래 이름은 달실마을이다. 종택 옆에 유명한 청암정이 자리한다.

청암정은 크고 넓적한 거북 모양의 자연석 위에 올려 지은 정자다. 거북 바위 주변으로는 연못이 조성돼 있고, 주변에는 향나무, 왕버들나무, 소나무가 우거져 정자의 운치를 한껏 살리고 있다. 정자를 올려다보거나, 정자 마루에서 아래쪽 충재를 둘러보면 옛사람들의 빼어난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충재는 권벌이 독서하던 건물이다.

닭실마을은 한과로도 유명하다. 마을 아낙들은 집집이 4대까지 제사를 모시다 보니 하루가 멀다고 모여서 한과 등 제사 음식을 준비했다. 500년을 이어 온 아낙들의 한과 솜씨를 알고 있던 봉화군청의 권유로 약 20년 전부터 한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닭실마을을 구석구석 둘러봤으면 걷기가 마무리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닭실마을을 벗어나 신작로를 한동안 따르면 유곡2리인 탑평마을 입구에서 걷기가 마무리된다. 4㎞가 채 안 되는 짧은 길이지만 봉화 역사의 한 단면과 충재 선생을 비롯한 안동 권씨 종택을 둘러볼 수 있는 아늑한 솔숲길이다.
▲ 글·사진= 윤석홍 시인·도보여행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