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ck 3d gpu
바로가기
왼쪽 메뉴로 이동
본문으로 이동

[윤용섭의 신삼국유사] 65. 차득공 이야기

남루한 옷을 걸치고 돌며 민정을 살핀 거사

윤용섭 전 한국국학진흥원 부원장   |   등록일 2018.09.13 20:23  
공유하기

구글+구글+ 카카오톡카카오톡 카스카스 라인라인 밴드밴드 텔레그램텔레그램 URL복사URL복사

URL 복사

아래의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하실수 있습니다.

황룡사
어느 날 대왕이 그의 서제(庶弟)인 차득공(車得公)을 불러서 말하기를, “그대가 총재(곧 재상)가 되어 백관들을 고루 다스리고 사해를 태평하게 하라(均理百官 平章四海).” 하니 차득공은 말한다.

“폐하께서 만일 소신을 재상으로 삼으시려 하신다면 신은 원컨대 국내를 잠행하여 요역(?役)의 괴롭고 편안한 것과 조부(租賦)의 가볍고 무거운 것과 관리의 깨끗하고 흐린 것을 알아보고 난 뒤에 그 직책을 맡을까 합니다.” 공(公)은 치의(緇衣)를 입고 비파(琵琶)를 손에 잡아, 거사(居士)의 모습으로 서울을 떠났다. 아슬라주(지금의 명주/溟州)· 우수주(지금의 춘주/春州)·북원경(지금의 충주/忠州)을 거쳐 무진주(지금의 해양/海陽)에 이르기까지 두루 촌락을 돌아다니노라니 무진주의 관리 안길(安吉)이 그를 이인(異人)인 줄 알고 자기 집으로 청해 정성껏 대접했다. 밤이 되자 안길은 처첩 세 사람을 불러 말했다.

“오늘밤에 거사(居士) 손님을 모시고 자는 이는 내가 몸을 마치도록 함께 살 것이오.” 두 아내는,

“차라리 함께 살지 못할지언정 어떻게 남과 함께 잔단 말이오.” 했다. 두 아내가 거절했으나, 한 사람이 그 명을 따랐다. 이튿날 일찍 떠나면서 거사가 말했다.

“나는 서울(京師) 사람으로서 내 집은 황룡사(皇龍寺)와 황성사(皇聖寺) 두 절 중간에 있고, 내 이름은 단오[端午; 속언에 단오를 차의(車衣)라고 함]요. 주인이 만일 서울에 오시거든 내 집을 찾아 주면 좋겠소.”

그 뒤에 차득공은 서울로 돌아와서 총재가 되었다. 나라 법에 해마다 각 고을의 향리(鄕吏) 한 사람이 서울에 올라와 여러 관청에 수자리 살게 했다(주, 이것이 지금의 기인(其人)이다). 이때 안길이 차례가 되어 서울로 왔다. 두 절 사이로 다니면서 단오거사(端午居士)의 집을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안길은 길 가에 오랫동안 서 있노라니 한 늙은이가 지나다가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말한다.

“두 절 사이에 있는 집은 대내(大內)이고 단오란 바로 차득공(車得公)이오. 그가 외군(外郡)에 숨어 다닐 때 아마 그대와 사연이 있어 약조한 일이 있었던 듯하오.”

안길이 그 실정을 이야기 하니, 노인 가로되,

“당신이 궁성의 서쪽으로 가서 정문으로 들어가 출입하는 궁녀에게 고하시오.”

안길이 그대로 따라 무진주의 안길이 문에 왔다고 고하니, 공이 듣고 달려 나와 손을 잡고 궁에 들어가서 공의 부인을 불러내어 함께 잔치를 벌였는데 음식이 50가지나 되었다. 이 말을 임금께 아뢰고 성부산(星浮山) 밑에 있는 땅을 무진주 상수(上守)의 소목전(燒木田)으로 삼아 백성들의 벌채를 금지하여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니 안팎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산 밑에 밭 30무(畝)가 있는데 3석(石)의 씨앗을 뿌리는 밭이다. 이 밭에 풍년이 들면 무진주가 모두 풍년이 들고, 흉년이 들면 무진주도 또한 흉년이 들었다 한다.

차득공과 안길의 이야기는 현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당대에는 이를 미담으로 여겼으니, 인간풍속의 변화란 참으로 무상하다 하겠다. 이 이야기에서 재상이 되기 전에 남루한 옷을 걸치고 방방곡곡의 민정세태와 관리의 행실을 직접 살피는 태도가 돋보인다. 그리고 신라인의 생각과 생활풍속은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전체선택후 복사하여 주세요.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