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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오래된 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졸업앨범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던 여섯 친구들이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18세, 19세 때의 해맑은 홍안(紅顔)들이 빛나는 사진입니다. 공교롭게도 그 사진 속의 여섯 친구들은 모두 직업이 달랐습니다. 정치가, 변호사, 의사, 사업가, 군인, 교수로 각자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저 빼고는 모두 사계(斯界)의 촉망받는 인재들이었습니다. 시제를 과거형으로 하는 것은 사진 속의 친구들 중 두 명이 이미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입니다. 또 한 친구는 엄중한 투병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사진을 다시 보게 된 것도 친구의 투병 소식을 전해 듣고 였습니다. 공부에 바쁜 친구들을 불러 모았던 게 저였기에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제 마음은 남다른 슬픔에 젖습니다.

비감(悲感) 속에서 사진 속의 그 시절을 회고합니다. 정말 좋은 때였습니다. 금강석처럼 빛나고 단단한 시절이었습니다. 제게는 집안 형편이 갑자기 기울어 무척 어려운 때였습니다. 친구들이 제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숙소를 얻지 못해 길거리에 나앉을 신세가 된 저에게 한 친구는 입주 가정교사 자리를 소개해주었습니다. 그 친구 덕분에 한 학기 무사히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또 한 친구는 학생회장 자리(입후보)를 양보하고 자신은 부회장으로 동반 출마해 주었습니다. 회장 출마 의사를 먼저 밝힌 것은 그 친구였는데 제가 양보를 요구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습니다. 고교 시절 학생회장의 경험은 제게 꼭 필요했던 자긍심의 씨앗을 심어주었습니다. 또 한 친구는 대학 2학년 때 한 학기 등록금을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때도 앞뒤가 꽉 막혀 꼼짝없이 휴학하고 입대해야 할 처지였는데 그 친구가 공부를 계속하게 도와주었습니다. 덕분에 하고 싶었던 소설 공부를 꾸준히 해서 군 복무 시절에 소설가로 입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세 친구는 사진 속에 있는 친구들입니다. 사진에 없는 한 친구는 학창 시절 아르바이트가 여의치 않을 때마다 보름씩 한 달씩 먹여주고 재워주었습니다. 잘 나가던 사업이 크게 잘못되어 한동안 보지 못하다가 몇 년 전 오랜만에 늙은 모습으로 만났을 때 약속이나 한 듯 서로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또 한 친구는 영어사전 하나 없이 공부하던 저에게 두툼한 영어사전을 선물했습니다. 사전은 담임선생님을 통해서 제게 전달되었습니다. 자기가 준 것이라고 절대 말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는데 저도 절대 알아야겠다고 우겨서 지금껏 그 친구에게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 또 어떤 공작(?)을 하셨는지 모르지만, 아마 그 친구는 여태 제가 자신의 선행을 모르고 있을 것이라 여길 것입니다.

앞의 친구 이야기 중에는 이미 고인이 된 두 친구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정말 진중하고 착한 친구들이었습니다. 일찍 고인이 되어서도 아니고, 제게 도움을 준 친구들이어서도 아닙니다. 살아오면서 그 친구들만큼 살아서 진정했던 자들을 몇 사람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애달픕니다. 그 친구들이 없었다면 저의 지금도 없었을 것이어서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또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진 속의 친구들과 사진 밖의 친구들, 모두를 놓고 보았을 때 가장 진정하지 못했던 자가 바로 저였습니다. 겸손도 엄살도 아닙니다. 사실이 그랬습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눈앞의 손익만 계산하고, 우정을 가볍게 여기고, 마음속으로 교만했던 자가 저였습니다. 친구들이 그런 저를 나무라며 하던 말이 있습니다. ‘정 좀 내고, 계산하지 말고, 얼굴 좀 펴고 살아라’가 그것입니다. 정 없는 건 여전합니다. 다만, 얼굴 펴고 계산 없이 살아보자는 생각은 요즘 들어 많이 합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살아서 진정했던 친구들의 몫까지 제가 살아내려면 못해도 그 정도는 꼭 해야 될 것 같아서입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 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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