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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문학을 생업으로 삼은 지 거진 반세기가 다 되어갑니다. 돌아보면 꿈같은 세월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작품 하나 남기지도 못하고 그저 비몽사몽 헤매고 살았습니다. 한때 시인의 정인(情人)이었던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지요? 평생 모은 수백억 재산이 젊어 사랑했던 한 사람의 시 한 구절보다도 못하다고요. 시인 백석(白石)을 사랑했던 한 여인의 회고담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런 ‘먼 그대’에 대한 동경은 남녀를 불문,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세계적인 문호 헤밍웨이도 죽기 전에 그런 소회를 피력했습니다.

“‘노인과 바다’를 썼을 때 패혈증에 걸렸어요. 그 책은 몇 주 만에 썼죠. 한 여자를 위해 썼습니다. 그 여자는 내 안에 그런 게 남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죠. 그 여자한테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그러길 바라고. 내 모든 책 뒤에는 여자가 있었어요.”(백민석,‘헤밍웨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남자의 여자’나 ‘여자의 남자’로 사는 것 같습니다. 특히 문학 하는 사람들은 그런 자기 인식이 더 강하고요. “인간은 파멸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노인과 바다’)나,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백석,‘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나 모두 그런 ‘먼 그대’에게 바치는 헌사(獻辭)입니다. 허세(虛勢)든 순정(純情)이든 그 배후에는 어쩔 수 없이 나만의 ‘먼 그대’를 둘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이고 문학인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문학은 ‘먼 그대’에 이르는 ‘먼 길’의 노정(路程·목적지에 이르는 거리)입니다. 그 ‘먼 길’의 끝에서 ‘먼 그대’와 함께하는 집 하나 지을 수 있으면 하는 것이 문학 하는 모든 이들의 소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이 또한 문학의 숙명입니다. 살아서 진정했던 자들에게는 늘 인생이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혼자 가는 먼 집’(허수경)만 허용될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무를 수도 없는 참혹”을 노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가까운 이들의 부고(訃告)를 종종 듣습니다. 그럴 때마다 수족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겪습니다. 얼마 전에도 그런 고통을 느꼈습니다. “한 여자가 한 세상이다”(김서령, ‘여자전’)라는 걸 스스로 보여주고 많은 이들의 ‘먼 그대’가 되어 떠난 이의 작별인사를 접했습니다. 우리는 스무 살의 홍안(紅顔)으로 대학 강의실에서 만났습니다. 그는 문리대 국문과, 저는 사범대학 국어과 학생으로 1년의 교양과 정부 생활을 한 교실에서 함께 보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글 잘 쓰는 소녀’였습니다. 학생회 일이나 하면서, 허세나 부리며 얼렁뚱땅 학교를 다니던 저와는 전혀 다른 순정파 모범생이었습니다. 그와 동향이었던 한 친구가 그를 연모한다고 제게 말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까맣게 잊었던 그를 다시 본 것은 ‘김서령의 가(家)’라는 책에서였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아마 우리는 그동안 서로 다른 ‘먼 길’을 걷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제서야 그의 ‘먼 길’과 ‘먼 집’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신문 잡지에서 인물 인터뷰를 오래 했다. 그러면서 발견한 게 찻집에서 세 시간 이야기를 듣느니 살림집에 30분 가보는 편이 훨씬 낫더라는” 그의 집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습니다. 이집 저집 이야기의 틈새에서 그가 소원하는 ‘먼 집’의 윤곽이 어렴풋하게나마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사랑과 기품이 배어있는 글 집이 아름다웠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서령씨, 잘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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