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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성무 수필가
효에는 사전효(死前孝)와 사후효(死後孝)가 있다.

사전효는 부모 생전에 존경, 순종, 능양(能養)이 기본이며 항상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도 중요한 효이다.

명심보감 효편 한 구절에 자왈 부모재, 불언유, 유필유방(子曰 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이라 하였거늘.

이 뜻은 공자께서 말씀 하시기를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거든 먼 여행을 말 것이며 여행을 하더라도 반드시 위치를 알려야 했다.

부언하면 출필고, 반필년(出必告, 反必面)하고 벼슬자리 있다가도 한양에서 낙향(落鄕)하여 부모 가까이에서 조석으로 문안을 드려야 했다.

족손의 모임을 친족집단조직으로 종친회 또는 화수회(花樹會)라고도 하는데 화수회는 뿌리를 섬기는 모임으로 뿌리는 보이지 않아도 비배관리를 잘하면 잎과 줄기가 튼튼해지므로 사후조상을 섬기면 자손이 번성하다는 이치와 같다는 것이다.

사후효에는 시묘(侍墓) 3년이라고 해서 부모의 상을 당하여 성분(成墳)한 묘 옆에 움막을 지어놓고 상주가 3년 동안 사는 일이다.

시묘(侍墓) 풍속이 있고 난 뒤에는 별도로 방에다가 제사상을 차려놓고 바쁜 농사일에도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밥상을 올리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삭망(朔望)을 하며 제사를 올리는데 소상(小祥), 대상(大祥)으로 남상은 3년, 여상은 2년으로 탈상을 한다. 그 뒤에는 설, 추석명절에는 차례를 올리고 돌아가신 날에는 자손들이 모여 기제(忌祭)를 올린다. 이는 4대 봉사로 고조부까지 모신다.

그 외에도 비가 많이 오거나 장마철에는 선조의 묘를 돌아보면서 관리를 하고 한식에는 가토(加土)를 하고 매년 음력 8월초에는 벌초(伐草)를 한다.

이제 오늘의 주제인 ‘벌초’에 대하여 논하기로 하자. 1년 중 음력 8월 초순 경에 산소에 풀을 깎고 단장하는 행사를 문중 직계존속별로 시행하고 있다.

매번 하는 벌초 문화가 변질되어 자손들이 생업에 바쁜 핑계로 벌초꾼을 사서 하는데 묘 1기에 몇 년 전에는 5만 원 하던 것이 해가 더해가면서 10만 원, 올해는 교통편이 안 좋은 곳은 15만 원까지 준다고 한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1년에 하루쯤은 시간을 할애해서 선조 묘에 자손들이 직접 풀을 베고 성묘하는 것도 사후효 일진데 벌초꾼을 사서 많은 돈을 써가면서 벌초를 하는 행위를 성의 부족으로 사후 불효라 할 것이다.

설, 추석 명절의 차례 제수도 일식을 맞추어서 제사를 올리는가 하면 추석에는 직접 지은 햅쌀로 송편을 만들어서 차례를 올려야 하는데 떡집에서 사서 하는 것도 역시 정성이 배제된 무성의한 사후불효다.

명심보감 효편에 ‘아버님이 날 낳으시고 어머님이 날 기르시니 가엾은지고 부모님이시여 날 낳으시기에 애쓰시었는데 그 깊은 덕을 어찌 갚을꼬! 하늘과 같이 끝이 없으시네’이는 효자가 부모의 봉양을 뜻대로 못하여 슬퍼서 읊은 소리다.

지난 세월 부모님을 굶주려가면서 허리끈을 졸라매고 공부시켜 놓았더니 각자 생업에 따라 흩어져 살면서 곁에서 봉양은커녕 요양원 신세가 아니면 독거노인으로 살다가 고독사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한 실상은 남의 일이 아니다.

이제는 효 문화와 벌초 문화가 변질되어 제수도 남에 손에 맡겨서 차리고 기제(忌祭)도 특정한 날을 정하여 선조를 한자리에 모시며 사방으로 연락해서 힘들게 모인 벌초 자리에는 산소 앞에 모여 앉아서 불참한 자손을 벌금을 부과한다느니 경비를 각자 부담하여 벌초꾼을 사서 하자는 등 갑론을박 이리 쿵 저리 쿵 소환을 피우는 장면도 산소 앞에서 조상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으로 깨달았다.

우리 문중은 벌초에 참여를 여러모로 궁리 끝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벌초날은 만사를 지쳐놓고 참석하기로 결의했다.

부모와 조상이 아니면 내가 이 세상에 어떻게 태어났겠는가 하는 보은(報恩)의 인의(仁義)에서 효의 본질인 숭조(崇祖)사상을 새롭게 고취하고 제례와 벌초는 남에게 맡기지 말고 특히 벌초하는 날은 직손들끼리 계(契)를 조직하여 매월 계금을 적립하고 벌초 날을 곗날로 정하였다.

벌초 날은 남녀 내외와 자식들까지 벌초에 참여하고 식당에 모여 파티와 아울러 놀이도 하면서 담소와 소통으로 즐겁게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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