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農著書論草名(신농저서농초명; 신농씨가 지은 풀 이름에 대한 책에) 草中羅蔘藥最精(초중나삼약최정; 풀 가운데 나삼이 약으로 가장 좋다네)…”

고려말 문신 안축(1287~1348)이 쓴 ‘蔘歎(삼탄)’의 첫머리다. 이 시는 장장 28행의 장시다. 시에는 해마다 원나라 왕이 공물로 나삼(신라삼)을 바칠 것을 요구해 의원들의 탄식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또 장사치들이 매점 매석하는 바람에 삼 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인삼을 구할 수 없는데, 백성들이 삼을 캐기 위해 베잠방이가 찢어지고 가시에 찔려 피가 흐를 정도로 온 산천을 누비는 모습을 그렸다.

우리나라 인삼은 신라 때부터도 그 효험이 알려져 삼국사기에는 진평왕 49년(627) 당에 공물로 신라삼(羅蔘)을 보냈다고 기록했고, 성덕왕 33년(734) 때도 당 현제에게 산삼 200근을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삼의 효능이 뛰어난 것을 안 중국인들은 고문헌에 삼국의 삼 이름을 다르게 쓰고 있다. 고구려의 삼은 ‘고려삼’, 백제의 삼은 ‘백제삼’, 신라의 삼은 ‘신라삼(羅蔘 나삼)’으로 세분해 기록했다.

영주의 소백산을 주산지로 하는 신라삼은 중국에서 그 명성이 매우 높아서 송나라 시인 소동파의 집에도 전해졌던 기록이 있다. 송나라 문인 장식이 동파의 집에 놀러 갔다가 신라삼을 보고 ‘신라삼견참부(新羅蔘見參賦)’라는 글을 남겼고, 시인 양만리는 동파로부터 신라삼을 선물 받아 감사한 마음을 담은 시 ‘사라삼(謝羅蔘)’이란 시를 읊기도 했다.

이렇게 삼이 귀하게 되면서 중국 공물 품목에 빠지지 않게 되자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1495 ~ 1554)이 해결책을 찾아냈다. 주세붕은 풍기의 토양과 기후를 조사해 봤더니 산삼이 많이 자생할 적합한 조건일 뿐 아니라 인공적으로 삼을 재배하기에도 적합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렇게 해서 산삼 종자를 채취해 풍기읍 금계동 임실마을 ‘개삼터’에 시험재배 한 것이 재배 인삼의 시초가 된 것이다. 500년 인삼 재배의 시원지 풍기에서 20일부터 28일까지 영주풍기인삼축제가 열리고 있다. 이 가을 단풍놀이도 하고 건강 찾으러 풍기 나들이 가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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