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3월 21일 중앙청회의실은 긴장이 감돌았다. 장덕수 암살사건에 대한 미국 군율(軍律)위원회의 공개재판이 열렸다. 성조기가 걸린 공판정에 나온 백범은 종일 심문을 받았다. 백범은 공판정 출두 전날 짤막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내가 이번에 미 군정 법정에 출두하는 것은 나를 미국 대통령 트루먼씨의 명의로 불렀으므로 국제 예의를 존중하기 위해서 나가는 것이지 내가 증인이 될 만한 사실이나 자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 김구가 장덕수 사건에 관련이 있다는 것처럼 발표된 데 대해서는 나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그것은 그렇게 발표한 그 사람의 모략이며 따라서 책임은 그쪽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사흘 뒤 두 번째 출정 심문이 시작되자 검사에게 언성을 높였다. “내가 여기에 나온 것은 국제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인데 애국자로 자인하는 나를 죄인같이 심문하므로 나는 이후로 대답을 못하겠소. 만약 나를 죄인으로 인정할 바에는 체포장을 내리시오” 일갈한 뒤 “사가살불가욕(士可殺不可辱)”을 외쳤다. 이 말은 “선비를 죽일지언정 욕을 보이지 않는 법”이란 뜻을 가진 말로 ‘예기’에 실려 있다.
“흙투성이 허물을 벗고 매미가 빠져나온 듯한 삶이었다. 혼탁한 세상에서 빠져 나온 듯 티끌 하나 묻히지 않고 살아간 사람이다” 사마천의 ‘사기’에서 굴원에 대한 평가다. 간신의 참소로 호남성 상수라는 강 근처로 귀양 간 굴원은 불충한 자로 낙인찍힌 치욕을 참지 못하고 유서 같은 시를 남기고 강물에 투신했다. “어찌 맑고 깨끗한 몸으로 더러운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차라리 흐르는 상수에 몸을 던져 물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
‘사가살불가욕’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참으로 안타까운 장군의 죽음이다. 생목숨까지 앗아가는 적폐수사 광풍은 언제쯤 끝이 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