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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현실은 종종 믿기에는 너무 참혹한 사실들을 전달합니다. 지난번 서울 지하철 사고에 이어서 이번에는 충남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또 한 사람의 아까운 젊음이 희생되었습니다. 듣고도 믿기 힘든 참혹한 죽음입니다. “아이가 죽었다는 소리에 저희도 같이 죽었습니다”라는 어머니의 절규가 가슴을 후벼 팝니다. 도대체 왜 이런 비인간적인 사회 속에서 살아야 하나라는 강한 의구심이 듭니다. ‘포용 사회’라는 정치 슬로건이 가증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오로지 효용성 하나에 목매고 사는, 앞에서 약 주고 뒤에서 병 주는, 이 무도(無道)한 세상을 더 이상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책임 있는 모든 기성세대들이 다 함께 나서서 과연 어떤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줄 것인지를 허심탄회하고 진지하게 한 번 따져봐야 할 때입니다.

용기를 낼 수 없을 때 우리는 참혹한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아예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립니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허울 좋은 이야기만 길게 늘어놓습니다. 현재의 비참을 어쩔 수 없는 운세로 돌리기도 합니다. 제어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는 헛된 믿음 속으로 도피합니다. 그런 도피 행각들이 중첩되면서 “내가 여기서 보는 것은 진짜가 아니다”라는 강력한 에너지를 지닌 감정이 조장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습니다. 보고도 믿지 않는 ‘탈현실화의 감정Entfremdungsgefühl’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 현상은 정신병에서 자주 발생하지만 정상인들 사이에서도 없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따금씩 환상이 건강한 사람들에게서도 발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현상은 확실히 어떤 기능의 마비를 의미합니다. … 이런 종류의 방어 기제가 일어난 사례를 하나 상기시켜 드릴까요? 당신은 스페인계 무어인들의 그 유명한 탄식, ‘슬프도다, 나의 알하마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보압딜 왕이 그의 도시, 알하마(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에서 30km 떨어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어떻게 접하고 있나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미 자신의 통치 기반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지만 왕은 ‘그것이 사실이도록 내버려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 소식을 ‘도착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기로 결심합니다. ‘그에게 편지가 당도했다네/알하마가 함락되었다는/그는 편지를 불 속에 집어던지고/사신(使臣)을 살해했도다’ 무력감 속에서 왕은 편지를 태우고 사신을 살해함으로써 스스로와 타인들에게 절대적 권력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프로이트, ‘쾌락 원칙을 넘어서’’

환상을 만들어내는 ‘탈현실화 감정’은 점치는 사회를 부추깁니다. 문명사회에 접어든 지금도 용하다고 소문난 점집에는 고객들이 줄을 섭니다. 일부 식자들 사이에서는 주역을 펼쳐놓고 스스로 동전을 던져서 육효(六爻)를 보는 일도 허다합니다. 물론 ‘점치는 사회’가 전적으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주나라의 문왕(文王)이 옥중에서 주역을 만들 때처럼, 무력감의 포로가 되지 않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유용한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물을 건너면(건너지 않으면) 흉하다”라는 점괘를, 좋지 않은 현실이 때를 거스르고 ‘물을 건넌(건너지 않은)’ 탓이라 여기고 심기일전을 꾀할 수도 있습니다. 그 경우는 점괘를 보는 행위 그 자체가 이미 반성과 쇄신의 의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점치기의 순기능을 외면하고 그저 현실을 모면하고자 하는 ‘탈현실화의 감정’으로만 가득 채운 점치기는 백해무익한 것입니다. 정치 슬로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먼저인 사회, 포용 사회, 다 같이 잘 사는 사회가 어떤 점치기인지, 혹여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아닌지, 한 번 곰곰이 따져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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