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의 아르바이트를 포함해서 제가 평생동안 생업에 충실했던 까닭은 분명 제가 물고 태어난 그 흙수저 때문입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라고 아버지는 자주 말했습니다. 아마 공산 치하에서의 무산자 콤플렉스가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표출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없는 집 아이’였던 제게는 “공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로 들렸습니다. 그 덕에 어렵지 않게 대학도 가고 직장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성가(成家)한 뒤로는 그 말씀이 “식구를 굶기면 가장이 아니다”로 바뀌었습니다. 군대를 제대한 직후의 일입니다.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학업을 계속하면서 박봉의 대학 시간강사로 지내는 것과 사범대학 출신답게 중등학교 발령을 받아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 그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비정년트랙이긴 하지만 사관학교 교관도 국립대학 교수 신분인데 교수를 지내다가 중등학교 교사가 된다는 것이 좀 머쓱했습니다. 군대 동기들도 대부분 대학 쪽에서, 교수가 아니면 조교나 연구원으로라도, 자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생활은 걱정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했습니다만 “식구를 굶기지 마라”라는 정언명령(?)을 도저히 거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후 주경야독, 4년 동안 간간이 소설도 쓰고 르포도 쓰며 생업과 학업을 병행했습니다.
저를 아버지로 둔 저희집 아이들은 늘 불만이 많았습니다. 자식에게 통 투자를 하지 않는 아버지, 툭하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라는 케케묵은 공산당 구호나 외치고, 시도 때도 없이 그저 자력갱생(自力更生)만 강조하는 시대착오적인 꼰대 아버지가 바로 저였습니다. 있는 집에 태어난 줄 알았는데, 유행하는 옷도 한 벌 안 사주고 과외도 안 시켜주고 대학도 국립대학만 보내주고, 왜 그렇게 없이 자라야 했는지 아이들은 그 까닭을 모르겠다고 투덜대곤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주 잠잠합니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현재 처지에 크게 불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행입니다. 저는 없는 집 자식으로 태어나서 있는 집 아이들의 처지를 잘 모릅니다. 그저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뿐 그들의 성취와 좌절을 속속들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자식을 키울 때도 제가 아는 방식으로, 내 품삯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비용을 댈 수밖에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있는 집 자식이었던 아버지가 저를 그렇게 키운 것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