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나라 되찾고자 똘똥 뭉친 '민족의 혼' 길이 빛나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다. 3·1 운동은 우리의 민족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려 독립을 이루기 위한 범국민적 항쟁이었다.
대구·경북인들은 잃어버린 나라를 시름 하며 그저 가만히 앉아있지 않고, 격정적이고 능동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무엇보다 이 지역은 3·1 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벌어진 지역 중 하나이다. 때문에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 정도도 다른 지역에 비해 극심했다.
시위 횟수로 보면 의성과 안동이 각 14회로 가장 여러 차례 일어났고, 영덕 8회, 성주 7회에 이어 상주·구미 선산이 각 4회, 대구·영주·청도가 각 3회, 그리고 나머지 시·군에서 한두 번 씩 일어났다. 참가 인원은 안동이 9200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 의성·대구·성주가 각 3000여 명, 영덕·영주가 각 2000여 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이는 일제 측의 수치가 축소된 것으로 실제 피해는 더 많았을 것이다. 사망자만 보더라도 현장조사 수치가 실제와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안동지역에서 사망자가 가장 많아 15명으로 기록되었지만, 당시 사망한 인물은 30명 정도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태형을 당하거나 구타를 당한 인물들이 집으로 옮겨진 뒤에 사망한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세시위가 한순간에 전국적으로 퍼지자 일제 군경은 4월 들어서는 경고 없이 실탄으로 사격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로 인해 희생자는 더욱 더 늘어났다.
경북 3·1 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유림과 기독교가 주된 축이었다. 이들은 곳곳마다 독립적으로 추진하기도 했지만 협력하여 함께 만세운동을 펼친 곳도 많았다.
나라 밖에서도 경북인들은 3·1 운동에 앞장섰다. 먼저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길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이다. 여기에는 한국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이며, 민주자립국임을 선언하고, ‘한일 합병’은 일본이 한국을 사기와 강박, 그리고 무력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강제로 병합한 것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이 선언서 본문 끝에는 39명의 대표자 중 경북 사람으로 이상룡과 김동삼의 이름이 들어있다. 이는 1919년 무렵 한국 독립운동계를 이끌던 최고 지도자 대열에 두 사람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경북인들이 주로 망명해 있던 서간도에서도 4월 초순까지 독립만세가 일어났다. 3월 12일에는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에서 만세시위가 펼쳐졌으며, 화전현에서도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영덕 지품면 출신의 윤악이·신분금은 영덕군 원전동 시장에서 3·1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두 사람은 모두 남편이 독립운동을 계획하다 검거되자 함께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뜻을 모았다. 1919년 3월 24일 원전동 시장에서 윤악이가 먼저 앞장서 “우리는 여자인데도 한국독립을 희망하고 한국의 만세를 부르짖는다”라고 연설하자 신분금이 여기에 호응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 일로 윤악이는 징역 8개월을, 신분금은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파리장서에서 경북 사람의 기여도가 절대적으로 높다. 우선 발단에서 준비과정 전체의 중심축이 김창숙과 이중업 등 경북 출신으로 이루어졌다. 또 문안 작성과 파견에서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서명자를 보면 전체 137명 가운데 경북 사람이 62명이니 45%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