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나라 되찾고자 똘똥 뭉친 '민족의 혼' 길이 빛나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다. 3·1 운동은 우리의 민족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려 독립을 이루기 위한 범국민적 항쟁이었다.

대구·경북인들은 잃어버린 나라를 시름 하며 그저 가만히 앉아있지 않고, 격정적이고 능동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무엇보다 이 지역은 3·1 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벌어진 지역 중 하나이다. 때문에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에 대한 일제의 탄압 정도도 다른 지역에 비해 극심했다.
2.8독립선언서
대한독립선언서
이에 맞선 대구·경북인들의 활약상은 그 어느 지역보다 돋보였다. 아울러 대구·경북인이 펼친 독립운동의 특성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통합성이다. 다양한 이념과 방략으로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대구·경북인들은 힘을 모으고자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정신은 우리세대가 재조명하고 계승해야 할 민족의 혼(魂)이다.

대구 서문시장 1990년대 모습(독립운동사적지)
대구·경북의 3·1 만세운동은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을 시작으로 5월 7일 청도군 매전면 구촌리에 이르기까지 두 달 동안 80곳이 넘는 곳에서 90회 넘게 일어났다. 가장 먼저 일어났던 대구 만세운동은 일본 군경의 특별경계 속에서도 기독교계 인사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는 약 1000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이어 11일 포항, 12일 의성군 비안면과 구미시 인동에서 일어나면서 확산 조짐을 보였다. 그러다가 폭발적으로 확산된 것은 3월 16일 이후이며, 27일까지가 절정을 이루었다.

시위 횟수로 보면 의성과 안동이 각 14회로 가장 여러 차례 일어났고, 영덕 8회, 성주 7회에 이어 상주·구미 선산이 각 4회, 대구·영주·청도가 각 3회, 그리고 나머지 시·군에서 한두 번 씩 일어났다. 참가 인원은 안동이 9200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 의성·대구·성주가 각 3000여 명, 영덕·영주가 각 2000여 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안동면 1차 만세시위 장소(현 신한은행 앞)
3·1 운동의 강도도 지역별로 차이가 컸다. 경북에서 군 단위로 보면 가장 강성을 보인 곳이 영덕과 안동이고, 그 뒤를 이어 대구·의성·성주·칠곡 등의 순으로 이어졌다. 이를 알 수 있는 일제 측 자료를 보면 경북지역에서 일제 관헌에게 붙잡힌 사람은 모두 2133명이다. 이 가운데 영덕이 489명으로 가장 많고, 뒤를 이어 안동 392명, 대구 297명, 의성 190명, 칠곡 135명, 성주 133명 등의 순이다.
매일신보 1919년 3월 15일자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의 조사에 따르면, 경북지역에서 만세운동에 참가 인원은 27개 지역에서 1만6500여 명, 사망자 25명, 부상자 69명, 구속자 1532명으로 집계하고 있지만 박은식이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3월에서 5월 사이에 경북에서 만세운동이 93회에 6만3000명이 참가해 사망 1206명, 부상 3276명, 붙잡힌 인물이 5073명으로 기록돼 있다.

이는 일제 측의 수치가 축소된 것으로 실제 피해는 더 많았을 것이다. 사망자만 보더라도 현장조사 수치가 실제와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안동지역에서 사망자가 가장 많아 15명으로 기록되었지만, 당시 사망한 인물은 30명 정도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태형을 당하거나 구타를 당한 인물들이 집으로 옮겨진 뒤에 사망한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세시위가 한순간에 전국적으로 퍼지자 일제 군경은 4월 들어서는 경고 없이 실탄으로 사격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로 인해 희생자는 더욱 더 늘어났다.

경북 3·1 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유림과 기독교가 주된 축이었다. 이들은 곳곳마다 독립적으로 추진하기도 했지만 협력하여 함께 만세운동을 펼친 곳도 많았다.

나라 밖에서도 경북인들은 3·1 운동에 앞장섰다. 먼저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길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이다. 여기에는 한국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이며, 민주자립국임을 선언하고, ‘한일 합병’은 일본이 한국을 사기와 강박, 그리고 무력 등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강제로 병합한 것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이 선언서 본문 끝에는 39명의 대표자 중 경북 사람으로 이상룡과 김동삼의 이름이 들어있다. 이는 1919년 무렵 한국 독립운동계를 이끌던 최고 지도자 대열에 두 사람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경북인들이 주로 망명해 있던 서간도에서도 4월 초순까지 독립만세가 일어났다. 3월 12일에는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에서 만세시위가 펼쳐졌으며, 화전현에서도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2.8 독립선언 대표 10인 중 한 명인 고령 출신 김상덕
김동삼
거족적 민족운동이었던 3·1 만세운동에는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들 역시 큰 역할을 했다. 경북에서는 남자현·김락·임봉선·김정희·윤악이·신분금 등이 3·1 운동에 나섰다. 영양의 남자현은 1896년 의병항쟁에 나섰던 남편 김영주가 전사하자 남편의 원수 일본을 향한 저항의식을 품고 있다가 서울로 올라가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김창숙
김보곤 신원카드
또한 안동 내앞마을 출신으로 3대에 걸친 독립운동 명가의 안방을 지킨 김락도 있다. 그녀의 시아버지 이만도는 의병장 출신으로 나라가 망하자 단식하여 순절했고, 남편 이중업은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했다. 두 아들도 대한광복회와 2차 유림단의거에 참가했으며, 두 사위도 독립운동에 나섰다. 김락은 예안면 3·1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 수비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두 눈을 잃었다.
이상룡
칠곡 출신인 임봉선은 1919년 3월 8일 자신이 교사로 있던 신명여학교 학생 50여 명을 이끌고 대구 서문시장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또한 영천 출신 김정희는 1919년 4월 12일 과전동 시장의 만세운동에 자극을 받고, 그날 밤 집에서 칼로 손가락을 베어 명주천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혈서 깃발을 만들었다. 그녀는 다음날 밤새 만든 깃발을 들고 1인 만세시위를 펼치다 결국 일제 경찰에 붙잡혀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영덕 지품면 출신의 윤악이·신분금은 영덕군 원전동 시장에서 3·1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두 사람은 모두 남편이 독립운동을 계획하다 검거되자 함께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뜻을 모았다. 1919년 3월 24일 원전동 시장에서 윤악이가 먼저 앞장서 “우리는 여자인데도 한국독립을 희망하고 한국의 만세를 부르짖는다”라고 연설하자 신분금이 여기에 호응하여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 일로 윤악이는 징역 8개월을, 신분금은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의성군 비안면 경북 독립운동 시발지
경북의 3·1운동이 다른 지역에 견주어 독특한 특성을 말하라면‘파리장서’를 들 수 있다. 파리장서는 3·1 운동 직후 일부 유림들이 나서서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한국을 독립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독립청원서를 보낸 일이다. 이후 1925년에서 이듬해까지 경북지역 유림들 사이에서 군자금을 모은 거사가 있었으니, 이를 일제가 ‘경북유림단사건’이라 이름을 붙였다.

파리장서에서 경북 사람의 기여도가 절대적으로 높다. 우선 발단에서 준비과정 전체의 중심축이 김창숙과 이중업 등 경북 출신으로 이루어졌다. 또 문안 작성과 파견에서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서명자를 보면 전체 137명 가운데 경북 사람이 62명이니 45%에 이른다.
경북독립운동기념관 전경
강윤정 경북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은 “3·1 운동의 한 영역에 속하는 파리장서는 당시까지 가장 전통에 매달려 있던 보수 유림마저 세계관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보여 영남과 호서의 유림이 통합하여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크다”며 “이 거사를 기획하고 펼쳐 나가며, 마무리를 짓는 그 순간까지 주역을 맡은 이들의 대부분이 경북 출신이라는 사실은 유림이 펼친 독립운동사에서 경북인의 기여도와 위상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오종명 기자
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안동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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