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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새해 벽두부터 장거리 출장을 두 번 다녀왔습니다. 하나는 강연이고 하나는 검도 사범 강습회 출석입니다. 선생으로 한 번, 학생으로 한 번입니다. 이 나이에 아직도 학생으로 임하는 경우가 있는 게 좀 안쓰럽기도 합니다만 취미생활을 밀도 있게 하려면 그런 수고를 아낄 수가 없습니다. 교통편이 좋지 않아 두 건 다 차를 몰고 다녀왔습니다. 서쪽과 북쪽, 행선지 두 곳이 모두 두 시간 반 이상 걸리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하루 동안 대여섯 시간을 운전하려니 노구(老軀)가 힘에 부쳤습니다. 젊어서는 차 운전이 좋아서 가족여행이나 친구들과 놀 때도 늘 제가 차를 몰았습니다. 그러나 세월 앞에는 장사 없다고, 언제부턴가 남의 차 타는 게 훨씬 편합니다. 당연 먼 길은 필히 대중교통을 이용합니다. 그 까닭에 여행 좋아하는 집식구나 친구들과는 좀 소원해지는 느낌입니다. 그들 눈에는 제가 ‘운전 소인배’로 보일 것이 분명합니다. 방금도 집사람이 두어 시간짜리 바다여행을 제안했지만 강습회 여파로 어깨가 아프다는 핑계를 댔습니다. 안에서나 밖에서나 영락없이 소인배 행색입니다. 예전 같으면 당연히 제가 앞장서서 나설 일인데 말입니다. 소인배가 된 김에 소인배 이야기를 한 토막 하겠습니다.

소인배의 반대말로 대인배(大人輩)라는 말을 쓰는 이가 있습니다. 그걸 보고 고전문학을 전공하는 동료가 토를 달았습니다. 대인이 무리(輩)를 이루어서 무뢰배마냥 나대며 다니는 걸 봤느냐는 겁니다. 원래 ‘대인배’라는 말 자체가 없는 것인데 아무 말이나 마구 만들면 다 되는 줄 안다고 일침을 놓았습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습니다. 저도 좀 이상하다 싶기는 했습니다. ‘배(輩)’라는 말이 본디 지칭 대상을 비하(卑下)할 때 붙여 쓰는 말인데 그걸 ‘대인(大人·대인군자의 준말)’이라는 말에 붙여 쓰는 건 일종의 모순어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인배’라는 말은 패러디(풍자)나 역설법이나 반어법으로 사용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써서는 안 되는 말인 것입니다.

그 비슷한 경우로 ‘소인지덕(小人之德)’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아서 풀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풀은 넘어지게 되어 있다(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라는 구절 속에 그 말이 나옵니다. 처음 그 구절을 접했을 때 ‘소인에게도 덕(德)이 있다는 말인가?’라는 의문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바람이 불면 의당 땅으로 눕는 풀일진대 그 본연의 소행을 두고 굳이 ‘덕’이라고 불러줄 소이가 어디 있겠는가라는 생각도 뒤따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시인 김수영이 불후의 명작 ‘풀’을 쓰게 된 것도 다 저와 비슷한 엇박자 소회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용감한 상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시인의 본래적인 혁명심이 발동되어(소인배인 풀을 가르치려 하지 않고) ‘대인배’인 바람을 탓하는 심사가 시로 비화(飛火)된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입니다. 평생 눌려 지내야 하는 서민들에 대한 애정에서, 언제나 그렇게 ‘초상지풍’을 자처하는 것들에 대한, 그 대인배연(然) 하는 것들에 대한, 힘찬 조롱을 감행한 것이라고 여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역시 저의 소인배적인 발상이었음을 늦게나마 알겠습니다. 공자님이 이순(耳順·귀가 순해지는 경지)을 이야기한 까닭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소인에게 무슨 덕이 있겠습니까? 덕이 있으면 소인이 아니지요. 그러나 공자님은 인간이라면 모두 덕을 갖추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소인지덕’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대인’이라는 말에는 ‘배’를 붙여서는 안 되는 것처럼, ‘소인’이라는 말에는 ‘덕’을 붙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육도 있고, 감화도 있고, 성숙도 있고, 이순도 있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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