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인배의 반대말로 대인배(大人輩)라는 말을 쓰는 이가 있습니다. 그걸 보고 고전문학을 전공하는 동료가 토를 달았습니다. 대인이 무리(輩)를 이루어서 무뢰배마냥 나대며 다니는 걸 봤느냐는 겁니다. 원래 ‘대인배’라는 말 자체가 없는 것인데 아무 말이나 마구 만들면 다 되는 줄 안다고 일침을 놓았습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습니다. 저도 좀 이상하다 싶기는 했습니다. ‘배(輩)’라는 말이 본디 지칭 대상을 비하(卑下)할 때 붙여 쓰는 말인데 그걸 ‘대인(大人·대인군자의 준말)’이라는 말에 붙여 쓰는 건 일종의 모순어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인배’라는 말은 패러디(풍자)나 역설법이나 반어법으로 사용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써서는 안 되는 말인 것입니다.
그 비슷한 경우로 ‘소인지덕(小人之德)’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아서 풀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풀은 넘어지게 되어 있다(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라는 구절 속에 그 말이 나옵니다. 처음 그 구절을 접했을 때 ‘소인에게도 덕(德)이 있다는 말인가?’라는 의문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바람이 불면 의당 땅으로 눕는 풀일진대 그 본연의 소행을 두고 굳이 ‘덕’이라고 불러줄 소이가 어디 있겠는가라는 생각도 뒤따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시인 김수영이 불후의 명작 ‘풀’을 쓰게 된 것도 다 저와 비슷한 엇박자 소회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용감한 상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시인의 본래적인 혁명심이 발동되어(소인배인 풀을 가르치려 하지 않고) ‘대인배’인 바람을 탓하는 심사가 시로 비화(飛火)된 것이 아닐까 라는 의심입니다. 평생 눌려 지내야 하는 서민들에 대한 애정에서, 언제나 그렇게 ‘초상지풍’을 자처하는 것들에 대한, 그 대인배연(然) 하는 것들에 대한, 힘찬 조롱을 감행한 것이라고 여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역시 저의 소인배적인 발상이었음을 늦게나마 알겠습니다. 공자님이 이순(耳順·귀가 순해지는 경지)을 이야기한 까닭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습니다. 소인에게 무슨 덕이 있겠습니까? 덕이 있으면 소인이 아니지요. 그러나 공자님은 인간이라면 모두 덕을 갖추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소인지덕’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대인’이라는 말에는 ‘배’를 붙여서는 안 되는 것처럼, ‘소인’이라는 말에는 ‘덕’을 붙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육도 있고, 감화도 있고, 성숙도 있고, 이순도 있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