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조차 마다 않은 충정…차원높은 선비의 품격 만나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탁영 김일손 선생(濯纓 金馹孫·1464∼1498)과 祖父이신 절효 김극일 선생(節孝 金克一·1382-1456), 長姪 삼족당 김대유 선생(三足堂 金大有·1479-1552)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선생이 무오사화(戊午史禍)때 화를 입고 서거하신 후 청도지역의 유생들이 뜻을 모아 사당으로 바꾸고 자계사(紫溪祠)라 하고 탁영 선생을 제향해 왔다. 선생이 무오사화로 서거하실 때 서원 앞 시냇물이 붉은색으로 바뀐 이변이 있어 자계(紫溪)라 한 것이다.
광해 7년(1615년)에 절효 김극일, 삼족당 김대유를 병향했고, 현종 2년(1661)에는 나라의 公認과 경제적 지원을 받는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됐다.
고종 8년(1871)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24년에 사림과 후손들의 협의에 의해 김용희(탁영 14세 손)의 사재로 복원됐으며 1975년 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됐다.
자계서원(紫溪書院)의 대표적인 배향인물인 김일손 선생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으로 대대로 청도에서 살았다.
조선 전기의 학자이며 문신인 김일 선생은 성종17년(1486) 식년문과 갑과로 급제해 예문관에 등용된 후 청환직을 거쳐 이조정랑이 됐다. 연산군 4년(1498)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화근이 되어 참화를 당했다. 이 사건을 무오사화라 한다. 중종반정 후 도승지와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에 추증됐다.
△김일손 거문고(탁영금)보물 제957호
탁영은 스스로가 거문고를 직접 만들어 사용했는데 불에 타 없어질 뻔한 어느 노인 집의 오동나무 문짝을 가져다가 거문고를 만든 일화는 유명하다. 그 거문고의 별칭이 ‘문비금(門扉琴)이다. 1490년(성종 21)경에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문고 중앙 부분에 ‘濯纓琴(탁영금)’이라는 문자가 음각돼 있고 학 그림이 거문고 하단부에 그려져 있다. 거문고의 용두(龍頭)·운족(雲足) 등은 원형대로 보존돼 있고, 봉미(鳳尾)·괘 등 부품 일부를 개수한 흔적이 보인다.
1988년 보물 제957호로 지정된 탁영금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거문고로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귀중한 악기이지만, 역사에 흔적을 뚜렷이 남긴 젊은 선비의 기개가 담긴 정신적 문화유산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선비의 길을 묻다 - 탁영 김일손’전
탁영 김일손 종택의 비공개 유물들로 이루어진 이번 전시는 탁영 김일손 선생을 조명하는 첫 전시회로 선생이 생전에 사랑했던 거문고와 성종임금이 하사한 벼루, 선생의 증직교지 등은 청도에서는 처음으로 공개돼 그 의미가 더욱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