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서울의 독립선언에 이어 전국에서 3개월 동안 만세시위가 잇달았다. 온 겨레가 일어나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한 것이다. 경북에서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5월 7일 청도군 매전면 구촌리에 이르기까지 두 달 동안 80곳이 넘는 곳에서 90차례 넘게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1운동은 4월 11일 ‘대한민국’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나라를 세운 것이다. 또 바로 그날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공포되고, 임시정부(정부)와 임시의정원(의회)이 구성됐다. 10개 조로 구성된 임시헌장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제1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빈부 및 계급 없이 일체 평등함(제2조)’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즉, 민주와 법치,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담아낸 것이다. 이는 3·1운동이 이루어낸 중요한 결실이었다.
그 뒤 대한민국 정부(임시정부)와 의회(임시의정원)는 조국광복을 위해 27년 동안 나라 밖 중국에서 쉼 없이 투쟁했다. 이는 세계사에서도 찾기 힘든 일이다. 국가를 세우고 정부와 의회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펼쳐나간 사례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인 걸음에 경북 사람도 어김없이 함께했다. 더러는 대한민국의 서막에 참여하기도 하고, 더러는 만주에서 서로군정서를 만들어 지원했다. 또 국민대표회의 의장(김동삼)?임시정부 국무령(이상룡)을 맡기도 했으며, 한국광복군이 되어 기꺼이 전쟁터로 나갔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은 이번 기획전을 준비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경북인이 약 120명이 넘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여기에 한국광복군에 참여한 80여 명(전체 광복군의 10%)을 더하면 모두 200여 명이 넘는다. 이는 적은 수치가 아니다. 이처럼 경북인들은 민국(民國)이 뿌리를 내리고, 나라를 되찾는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한국근대사는 크게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하나는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나라를 세우는 일이었다. 우리의 독립운동 역사는 이 두 가지 시대 과제를 동시에 풀어나간 역사였다. 이 때문에 한국근대사에서 독립운동의 역사는 정통성과 큰 가치를 지닌다. 그 역사 가운데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은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100주년을 맞아 이를 기념하는 작업이 각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오늘 우리는 대한민국 100년의 역사를 맞이하고 있다. 한 세기가 다 되어가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시대 과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앞에 놓인 앞으로의 여정 또한 간단치 않을 것임이 자명하다. 그러나 그 고단한 순간마다 100년 전 ‘민국’의 역사를 열어주었던 시민 정신과 자유와 평등을 향한 열망, 인도주의가 우리의 등불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