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하고 별 인연 없는 나도 전에 어쩌다
빚 받으러 간 적 있다
조금 전에 이사 갔는데요

아버지 위중하단 전화 받고 내달렸는데
조금 전에 돌아가셨다, / 어머니가 말했다

나는 조금 전을 이겨본 적이 없다
준비물을 잊어먹고 집에 돌아갔다가
다시 학교로 뛰어가는 아이처럼
땀 흘려, 조금 전에 지각하곤 했다

흉하게 일그러지는 네 우는 얼굴에
지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조금 전에게 지면 늘 / 조금 뒤가 온다

빚쟁이가 먼 데로 숨었듯이
아버지가 몸밖에 없었듯이
응, 이제 괜찮아, 정말 괜찮아,

태연히 웃는 얼굴,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은
조금 뒤가 온다



<감상> “조금 전”을 이겨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안다. “조금 뒤”에 밀려오는 숱한 슬픔과 좌절을. 학창시절 친척집을 전전하면서 눈칫밥 얻어먹으며 지각은 얼마나 했던가. 육친의 마지막 임종도 지켜보지 못한 불효자식이 아니었던가. 빚을 받으러 갔는데 돈 있으면서도 주지 않거나, 도망간 못된 인간들도 보지 않았던가. 이 모든 것이 “조금 전”에게 진 것들이고, 내가 원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괜찮다고 위로하는 “조금 뒤”의 태연한 얼굴들. 이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고, 정녕 비틀어버려야만 조금 뒤에 밀려오는 슬픔과 좌절을 견딜 수 있었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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