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사실,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주제는 ‘상징이 있는 삶’입니다. 여유 있게 문화생활을 하면서 자신(자신이 속한 집단)을 되돌아보자는 취지로 그런 글감을 선택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아마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비유와 상징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으실 겁니다. “철책선에 비둘기가 날아왔다”라는 문장에서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라고 배우셨을 겁니다. 그리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의 ‘누님 같이’는 비유(직유법)라고 배우셨을 겁니다. 그래서 은연중에 비유 따로 있고 상징 따로 있는 것처럼 느끼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둘기’도 상징이고 ‘누님’도 상징입니다. 비유법의 문제와 상징이 되고 안 되고의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이를테면 비유적 이미지로 상징을 만들(발견할) 수도 있고 비유 없는 서술적 이미지만으로도 상징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인들은 늘 상징(적 언어), 즉 단세포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의미 가득한 시적 이미지를 창조(호출)하려고 노력합니다. 필요하면 비유도 쓰고 반어나 역설도 씁니다. 필요 없으면 안 쓰고요. 그러니까, 시를 읽다가 ‘심쿵’하는 단어나 구절이 나오면 대개가 상징일 공산이 큰 것이지요.
가끔씩 주역을 봅니다. 믿거나 말거나 식 운세도 보고 그때그때 필요한 반성의 계기도 찾습니다. 또 있습니다. 주역에서 ‘상징을 읽는 재미’가 그것입니다. 오늘 펼친 주역 서른 번째 괘, ‘중화리’(重火離), 이괘(離卦)의 경문(經文)이 재미집니다. “이(離)는 곧음이 이로우며, 형통하니 암소를 기르면 길하리라”(離利貞亨 畜牝牛吉)입니다. 이를테면 ‘암소를 기르다’가 상징입니다. ‘암소(牝牛)’는 고래로 함축이 많은 단어입니다만 무시하고 마음 가는 대로 읽겠습니다. “과거의 적폐와 결별하는 것은 이로운 일이나 항상 바르지 않으면 안 되고 널리 세상에 이로울 일을 몸소 실천할 때 비로소 길하다.”로 읽습니다. 최근의 정부 인사(人事)에 대한 불만이 일부 반영된 것 같습니다. 암소 한 마리만 잘 길러도 가족의 생계가 든든합니다. 나랏일 하는 이들이 ‘암소 기르듯’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에 부디 몰두해 줄 것을 당부드리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