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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한 때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표어(標語, 주의·주장·강령 등을 나타내는 짧은 어구)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 덕분인지 요즘 젊은이들 중에는 ‘저녁이 있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진행하는 검도교실 프로그램에도 최근 들어 젊은 대학생, 직장인의 참여가 눈에 띄게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전체 구성원의 60~70%가 30대 초반 이하의 젊은이들입니다. 30년 저의 사회체육 활동에서 처음 보는 현상입니다. 제가 사회체육에 본격적으로 입문했던 80년대 말~90년대 초만 하더라도 전문 체육인(프로그램 지도자 등)을 제외하고는 40대 전후반 연령이 모임의 주축을 이루었습니다.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하고 나서 신체 건강의 중요성을 절감한 중장년들의 참여도가 높았습니다. 그때를 회상하면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떠오릅니다. 구성원들이 ‘주류(酒流)’와 ‘비주류(非酒流)’로 나뉘어져서 파벌이 형성되곤 했습니다. 주류파 중에는 ‘(맛있게) 술 마시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 운동에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심으로 친목회가 만들어지고 때로는 월사금보다 친목회비가 더 나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는 비주류라 회식에는 참여하지 않고 열심히 운동만 했습니다. 초반에는 비주류가 그야말로 비주류(非主流)였습니다. 그러나, ‘꿩 잡는 게 매’라고, 실력이 밥 먹여주는 곳이 본디 스포츠나 무도(武道)의 세계인지라 곧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운동보다 술을 탐하던 선배들이 계속 두들겨 맞는 수모를 견디다 못해 한두 사람씩 떠났습니다. 제가 사범이 되었을 때는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뿔뿔이 다 흩어졌습니다.

서론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사실,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주제는 ‘상징이 있는 삶’입니다. 여유 있게 문화생활을 하면서 자신(자신이 속한 집단)을 되돌아보자는 취지로 그런 글감을 선택했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아마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비유와 상징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으실 겁니다. “철책선에 비둘기가 날아왔다”라는 문장에서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라고 배우셨을 겁니다. 그리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의 ‘누님 같이’는 비유(직유법)라고 배우셨을 겁니다. 그래서 은연중에 비유 따로 있고 상징 따로 있는 것처럼 느끼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비둘기’도 상징이고 ‘누님’도 상징입니다. 비유법의 문제와 상징이 되고 안 되고의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이를테면 비유적 이미지로 상징을 만들(발견할) 수도 있고 비유 없는 서술적 이미지만으로도 상징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시인들은 늘 상징(적 언어), 즉 단세포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의미 가득한 시적 이미지를 창조(호출)하려고 노력합니다. 필요하면 비유도 쓰고 반어나 역설도 씁니다. 필요 없으면 안 쓰고요. 그러니까, 시를 읽다가 ‘심쿵’하는 단어나 구절이 나오면 대개가 상징일 공산이 큰 것이지요.

가끔씩 주역을 봅니다. 믿거나 말거나 식 운세도 보고 그때그때 필요한 반성의 계기도 찾습니다. 또 있습니다. 주역에서 ‘상징을 읽는 재미’가 그것입니다. 오늘 펼친 주역 서른 번째 괘, ‘중화리’(重火離), 이괘(離卦)의 경문(經文)이 재미집니다. “이(離)는 곧음이 이로우며, 형통하니 암소를 기르면 길하리라”(離利貞亨 畜牝牛吉)입니다. 이를테면 ‘암소를 기르다’가 상징입니다. ‘암소(牝牛)’는 고래로 함축이 많은 단어입니다만 무시하고 마음 가는 대로 읽겠습니다. “과거의 적폐와 결별하는 것은 이로운 일이나 항상 바르지 않으면 안 되고 널리 세상에 이로울 일을 몸소 실천할 때 비로소 길하다.”로 읽습니다. 최근의 정부 인사(人事)에 대한 불만이 일부 반영된 것 같습니다. 암소 한 마리만 잘 길러도 가족의 생계가 든든합니다. 나랏일 하는 이들이 ‘암소 기르듯’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에 부디 몰두해 줄 것을 당부드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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