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 좋게 붙어 지내다가 한 순간의 일로 등 돌리는 정치인들 속성 안타까워

▲ 윤정대 변호사
매우 오래 전의 일이다. 내가 알고 지내던 A와 그가 선배로 따르던 B가 서로 다툰 일이 있었다. 다투었다고 하나 당시 불운한 일을 겪게 된 A를 B가 위로하기보다는 다소 듣기 싫은 소리를 해서 서로 말싸움을 한 정도였다. 사실 A는 그 무렵 실의와 분노의 정도가 심해 아무런 관련이 없는 주변 사람들마저 자신의 처지에 동조하지 않으면 피해의식을 드러내서 싸움을 벌이곤 했다. 나도 B가 당한 것처럼 사소한 말 때문에 A로부터 심하게 공격을 받았었다.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A를 만나게 됐다. A가 반가워하므로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다가 B 이야기가 나왔다. A의 말에 따르면 여전히 B가 과거에 자신과 다툰 일로 자신을 아예 외면하고 있다며 그 때문에 몹시 불편하다고 했다. A와 B의 사이는 다투기 전에는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서로 붙어 지내다시피 한 사이였다. 사실 둘의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일이 계속 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A와 그다지 친하지 않은 나도 A가 당시 실의에 빠진 상태에서 저지른 일로 이해하였으므로 B도 당연히 A를 이해하고 A와 화해한 줄 알았었다. 나는 A에게 내가 B를 만나 화해를 한번 주선해보겠다고 말했다.

나는 이후 B를 만나 "A가 화해를 하고 싶어 하니 이제 후배를 용서하고 지내는 것이 어떻겠나?"며 화해를 권했다. 그런데 B는 "나는 내 눈에 한번 벗어나면 평생 보지 않는 사람이다. 결코 화해할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A와 B가 다툰 일이 평생을 걸 정도로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B의 반응이 매우 뜻밖이었다. 대단치도 않는 일에 대단한 결의를 비치다니. 그는 A와 사이좋게 늘 붙어 지낸 사람인데 그렇게 보낸 과거의 시간들을 한 순간의 다툼으로 지워버렸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하일지의 소설 '경마장 가는 길'에는 주인공 R이 시내버스를 타고 가면서 겪은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R은 좌석이 없어 버스 뒤편에 서 있었는데 바로 앞에 앉은 버스 승객 한 사람이 알지도 못하는 주인공 R에게 "월산 아재는 숙모 돈 쬐비고 인동 아주매는 조카 돈 쬐비고"라는 말을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내뱉었다는 것이다.

소설의 이 장면은 내게도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게 했다. 어린 시절 집안 어른 한 분이 삼촌이 소 판 돈을 쬐벼 집을 나갔다는 말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곤 했다. 어린 마음에도 이미 지나간 일이고 오래 전의 일인데 왜 저 얘기만 자꾸 되풀이할까라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한 순간의 사건이 머리에 충격을 주고 각인이 되면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나이가 들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그런 사람은 대개 어떻게 보면 단순하면서도 자기 확신에 찬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현재도 미래도 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오로지 과거 가운데서도 자신에게 충격을 준 한 시점만이 판단의 기준이 될 뿐이다.

새누리당의 공천파동을 보면서 한번 눈 밖에 나면 평생 보지 않는다는 B의 대단한 결의와 머리에 한번 각인되면 거기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정치라는 것도 사이좋게 늘 붙어 지내다가도 한 순간의 일로 인해 평생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 벌이는 일인 것만 같아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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