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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한 변호사
‘Brave New World’는 올더스 헉슬리가 1931년에 쓴 고전 중의 고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멋진 신세계’로 통한다. 이는 아마도 일본어 제목인“素晴らしい 新世界”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어 제목 ‘Le meilleur des mondes’처럼 ‘최선(最善)의 세상’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았다는 생각이다.

헉슬리는 약 600년 후의 지구를 가상한다. 주인공 존이 우연히 경험하게 된 미래의 지구 세상은 그곳 관리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역사상 최선을 넘어 지고지선(至高之善)의 세상이다.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다. 출생부터 사망까지 모든 것이 관리되고 계획되고 있다. 혹시 계획되고 관리되지 못한 뜻밖의 불상사가 생겨 누군가가 잠시라도 약간이나마 불안하다는 정도의 생각만 들게 되더라도 그는 국가에서 나누어 주는 ‘소마(Soma)’ 한 알을 먹으면 간단히 이를 극복할 수 있다. 그는 다시 쉽게 행복해지는 것이다. 힘겨운 삶 속에서 친구와 술잔 기울이는 것도 버거워 혼자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우리 현실에 비추어 보면 혼술 소주 한 병이 소마 한 알쯤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소마와 달리 소주는 우리에게 숙취를 남기게 마련이다.

최선의 세상인 그곳의 모든 사람은 자신의 처지에 만족한다. 최상위 알파 계급을 포함한 모든 계급들, 심지어 최하위 계급인 입실론 계급의 사람들까지도 자기 삶의 의미 등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도록 신파블로프식(新Pavlov式) 조건반사교육과 수면암시교육을 받았다. 이들처럼 우리도 온종일 종편 채널을 보면서 우리 스스로가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들의 몫을 부당하게 가로채는 적폐세력이나 왜곡된 경제 시스템에 의문을 갖기보다는 ‘종북’이나 ‘좌빨’이라는 선동적 구호에 놀아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소설 속 모든 인간은 깨끗한 병 속에서 인공 수정되어 태어날 뿐 누구도 여성의 자궁에서 자라지 않는다. 따라서 누구도 어머니, 아버지가 없으며 가족이라는 개념도 당연히 사라진 지 오래다. 모기와 파리는 이미 완전히 제거되었다. 소비가 권장되며 언제나 균형적인 수요와 공급이 보장된다. 필요한 만큼의 물건을 만들 기계들이 얼마든지 있지만, 근로 계급들을 쉬지 않고 일하게 하는 것이 세상에 유익하다는 차원에서 근로자들의 노동도 계획된 분량만큼 주어진다. 만인은 만인을 위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누구라도 원하는 사람과 관계를 갖는 것이 권장되지만, 어느 남녀도 3개월 이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다.

주인공 존의 선택은 결국 그곳을 자발적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올더스 헉슬리 이후에 조지 오웰이 1948년에 그 유명한 소설 ‘1984’라는 작품을 써서 다시 한 번 “개개인의 인간으로서의 행복한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으리라.

만약 위와 같은 어떤 최선의 세상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누구도 개개의 인간이 아니라 사회의 부속품이 되어 ‘오로지 만인을 위하여’ 그곳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우리들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열린 사회에 살고 싶다. 그것을 위하여 우리는 하루하루 분투(奮鬪)해 온 것이다. 우리는 1987년 6월 항쟁을 통하여 이룩한 민주화로 우리가 다시 세상의 주인이 된 줄로 알고 살아왔지만, 최근에서야 어느새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다시 우리가 주인이 되어야 할 때가 왔다. 우리는 소설 속 주인공 존과 같이 그 세상을 떠나는 선택은 결코 할 수 없다. 우리는 세상을 원래 우리가 꿈꾸었던 대로, 국가가 아니라 사람이 주인이 되는 세상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이래야 비로소 진짜 멋진 신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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