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지역 최초의 중등교육 기관이었던 이 계성학교. 학교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붉은 벽돌들이 참 매력적이었습니다.

첫 번째로 둘러본 곳은 바로 ‘아담스관’이었는데요,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45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영남지역 내 최초의 서양식 건물입니다. 벽면은 서양의 고딕양식으로, 지붕은 우리나라 박공지붕에 기와가 얹어진 모습을 하고 있어 동서양이 절충된 특이하고 또 재미있는 건물입니다.  

//인터뷰//
이영숙/ 대구 중구 근대골목문화해설사
이 건물을 보시게 되면요. 빨간색으로 된 돌이 보이잖아요. 우리 대구에 성이 있었는데요. 1906~1907년 사이성이 헐릴 때 그 성돌을 이용해서 기초석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보면 빨간색 벽돌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중국 기술자들이 조적을 했다는 거고요. 지금 건물들을 보면 추녀 끝이라던가 일본풍이 살짝 나잖아요. 일본 목수가 이 건물을 설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기와가 올라가 있잖아요.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위화감 조성을 하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기와를 올려서 건물을 지었다고 합니다.

 

아담스관의 오른쪽 벽면을 따라 몇 걸음을 더 옮기면 성벽과 같은 모습을 한 ‘핸더슨관’(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47호)이 보이는데요, 계성중학교 교문을 지나, 50계단 뒤로 보이는 건물이 바로 이 핸더슨 관입니다.
이 건물은 여장을 설치해 중세의 성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요, 이 때문에 핸더슨관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성에 살고 있는 왕족이 된 듯 한 느낌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이영숙/ 대구 중구 근대골목문화해설사
마치 이렇게 보면 성처럼 보이잖아요. 외벽을 보면 성곽의 모습을 띠면서 면류관의 모습이 되면서 중세시대의 성에 와있는 기분이 드는 이 건물은요. 계성학교의 학생 수가 굉장히 늘어나면서 교사(校舍)가 더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건물을 짓게 되는데요. 블레어 선교사님이 안식년을 맞아 본국으로 돌아가셔서 모금을 해오셔서 이 건물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핸더슨 교장 선생님과 학생들이 기초석을 쌓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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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계성학교내 핸더슨관(대구유형문화재 제47호)


핸더슨관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안의와 선교사의 흉상 뒤로 작은 샛길이 하나 나있는데요, 이 길이 바로 ‘맥퍼슨관’(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46호)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현재는 계성중학교의 교회, 음악실 등으로 사용되는 이 곳은 아담스관과 같이 고딕풍의 벽면에 한옥 기와를 얹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서양식 건물을 접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거리감을 줄이고자 이렇게 지었다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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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계성학교 맥퍼슨관(대구유형문화재 제46호)

이영숙/ 대구 중구 근대골목문화해설사
여기 맥퍼슨관은요. 계성학교가 설립이 되고 많은 분들이 이 학교에 입학하기를 원해요. 그래서 학생 수가 많아지고 교사가 부족해져서 다시 5년 만에 새로 짓게 되는 건물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는 교실로 사용되었고요. 지금 현재는 교회 건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둘러 본 곳은 아담스관의 지하실입니다. 이 곳 지하실에서 계성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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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계성학교 아담스관(대구유형문화재 제45호)지하실 

이영숙/ 대구 중구 근대골목문화해설사
여기가 아담스관 지하고요. 3.1만세운동 당시에 독립선언서 등사를 비밀리에 했던 곳입니다그래서 백남채 선생님께서 비밀리에 만들기도 하고 하는데 우리 지역에서 굉장히 많은 양을 학교에서 만들다 보니까 독립선언서가 경북지역 각지에 운반돼서 사용되고요특히 청송지역에까지 운반돼서 사용이 되었다고 합니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79명의 대구사람들 중 44명이 이 곳 학생과 교사들이라 하니, 대구 독립운동의 뿌리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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