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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섭의 신삼국유사] 44. 탈해왕과 토함산

나라의 평안과 발전에 중요한 존재

윤용섭 삼국유사사업본부장   |   등록일 2017.06.01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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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 일출
탈해가 임금의 사위가 된 다음 계속되는 삼국유사 탈해니사금의 이야기다. 하루는 토해(吐解)가 동악(東岳)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백의(白衣)를 시켜 물을 구해오라 하매, 백의가 물을 떠가지고 오다가 도중에 먼저 맛보고 드리려하니 그 물 잔이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백의를 꾸짖으니 백의가 맹세하기를, “이후에는 가깝거나 멀거나 감히 먼저 맛보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그제야 그릇이 떨어졌다. 지금 동악에 우물 하나가 있어 사람들이 요내정(遙乃井)이라 하니 바로 이것이다.

이 대목은 탈해가 일종의 신통력을 가지고 있음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탈해의 다른 이름이 토해(吐解)인데,탈해와 음이 유사하다. 동악은 토함산을 말하는데, 토함과 토해의 발음이 또한 비슷하다. 토함산은 신라의 동악으로서 중요하며 뒷날 불국사와 석굴암이 만들어진 소중한 산이다. 탈해왕이 뒤에 동악의 신이 되었다 하니, 탈해와 토함산은 깊은 인연이 있다하겠다.

참고로 신라에는 오악(五岳)이 있는데, 통일 전에는 동악은 토함산, 서악은 선도산(仙桃山), 남악은 남산(南山), 북은 북악(北岳), 중앙은 부악(釜岳)이다. 그리고 통일 후에는 국토가 넓어짐에 따라 신라의 동서남북을 대표하는 산악을 다시 지정하였는데, 동악에는 토함산(吐含山), 서악에는 계룡산(鷄龍山), 남악에는 지리산(智異山), 북악에는 태백산(太伯山), 중악에는 부악, 곧 팔공산(八公山)이다. 오악은 통일신라의 상징적인 존재의 하나로서 나라의 진산(鎭山)이었으므로 국가의 제사를 받았다. 즉, 오악에 대하여,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구분되어 국가적 제사 가운데 중사의 예로 나라의 평안과 발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노례왕이 서거하매 광무제(光武帝) 중원(中元) 2년 정사(丁巳)(57년) 6월에 탈해는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성을 석씨(昔氏)라 하였다. 까치로 인하여 궤를 열게 되었으므로 작자(鵲字)에서 조자(鳥字)를 떼고 성을 석씨라고 했고, 궤를 열고 알에서 벗어져 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라 하였다는 이야기다. 재위 23년 건초(建初) 4년 기묘(己卯)(79)에 돌아가니 소천구(疏川丘)에 장사지냈다. 그 몸의 뼈 길이가 9척 7촌이나 되는데 엉키어 하나가 된 듯하고 뼈마디가 모두 연결된 역사(力士)의 골격이었다. 27대 문무왕 때인, 당 고종(唐高宗) 조로(調露)2년(680) 3월 15일 밤,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탈해인데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좇았다. 탈해는 곧 동악신이라 한다.소천구를 삼국유사 왕력에는 소정구(疏井丘)라고 하였다.

이상 탈해임금의 행적을 보건대, 지모와 신통이 있었으며, 동남아든 일본북부에서든 해상에서 경주로 온 세력이다. 골격이 특이하게 크고 튼튼했다는 기록은 통상적인 한국인이 아니라는 의미도 된다. 그가 하나의 세력권이었다는 것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도 나온다. 수로왕 즉위 초, 어린 탈해가 나라를 빼앗으러 왔는데, 술법으로 겨루어 지자 패주하였다. 탈해임금의 이야기에는 바다가 많이 나온다. 탈해가 온 아진포와 해척, 일본의 동북쪽 천리라는 다파나국, 용성국과 용에 관한 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그의 출신지가 일본의 동북쪽으로 천리 가량 된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의 북해도나 심지어 캄차카 반도 출신으로 볼 수도 있다. 여하튼 탈해임금의 연원을 볼 때, 신라에는 해양계통의 강력한 세력이 들어와 성공적으로 합류함으로써 그만큼 신라의 다양성을 높였으며, 생각보다 훨씬 해양국가적인 요소가 다분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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