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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이야기 속 인물 중의 갑(甲)은 역시 ‘승리하는 인간’입니다. “그 어려운 것을 제가 해냅니다”(‘태양의 후예’)라는 대사가 그들의 전유물입니다. 문학이든 역사든 철학이든, 인간이 만든 이야기라면 대개는 ‘승리하는 인간’에 대한 동경이나 격려로 귀결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승리’의 패턴은 각양각색입니다. 가장 흔한 패턴이 ‘분리-시련-귀환’입니다. 이때의 ‘귀환’은 크거나 작거나 금의환향(錦衣還鄕)입니다. 역대 이야기 속 인물 중 가장 크게 승리한 인물은 아마 심청이일 것입니다. 희생 제물로 바쳐진 소녀가 황후가 되어 눈먼 아버지의 눈까지 뜨게 합니다. 강제로 분리되지는 않더라도 기존의 평안을 박탈당했다가 시련을 겪고 더 큰 복을 받게 되면 그 경우도 ‘승리하는 인간’에 속합니다. 춘향이가 그런 예가 됩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의 공통점은 승리가 아니라 고된 시련입니다. 죽음과도 같은 시련을 견딘 자에게만 재생(再生)이 허락됩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 패턴을 재생모티프라고도 부릅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역시 ‘승리하는 인간’에 대한 격려입니다. 요즘 들어 개천에서 용 나기가 무척 힘들어졌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젊은 세대들에게는 참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르긴 해도 전후 세대의 태반은 스스로 ‘개천에서 난 용’으로 자처하지 싶습니다. 호구지책(糊口之策)에 별 어려움이 없다면 다 그렇게 자평할 것 같습니다. 전쟁의 포연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태어나 모두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던 처지이기 때문에 지금의 안락과 호사가 용 된 기분을 주기에 결코 모자라지 않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개천에서 난 용입니다. 아마 지금의 젊은 ‘어린 용’들은 절대 부모세대의 그 ‘용 된 기분’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모진 시련을 거쳐야 개천에서 놀던 새우도 용이 되어 비를 타고 승천할 수 있다는 ‘분리-시련-귀환’의 재생모티프도 그저 세월 잘 만난 꼰대들의 낡은 가치관 중의 하나라고 여기지 싶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세상에 대한 고마움을 잘 모르는 것이 부모 입장에서는 안쓰러울 때가 많습니다. 아마 ‘개천에서 난 용’들의 공통된 고민이지 싶습니다. 용의 자식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스스로를 못난 새우로 여기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얼마 전,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동료들과 퇴직 후의 삶에 대해서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몇 년 뒤면 다 정년을 맞이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만 별반 특별한 화제는 없었습니다. 제 차례가 왔을 때 저는 그저 “개나 한 마리 키우면서 살겠다”고 말했습니다. 반려동물이 좋은 것은 불필요한 감정 소비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젊을 때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원치 않는 시련도 겪었고 분에 넘치는 인정을 받기도 했습니다. 늙어서는 그저 편한 것이 제일이 아니겠냐고 말했습니다. 개나 한 마리 키우면서, 유유자적 사는 게 꿈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요절한 작가 김소진의 ‘개흘레꾼’이라는 소설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이북에서 피난 내려온 아버지가 이남에서의 사회적 삶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자식까지 부끄러운 ‘개흘레꾼’으로 살다가 흉포한 개에게 물려서 죽게 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디든 깊은 연못이 있는 곳이라면 ‘용 이야기’가 전설로 내려옵니다. 오래된 동네에는 이른바 용담(龍潭)이라는 것이 하나씩 있습니다. 모든 깊은 물에는 용이 살아야 되고, 깊은 물이 없으면 ‘용이 난 개천’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온 것이 우리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런 ‘용 이야기’에는 개가 잘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으니 굳이 가릴 일이 없겠습니다. 개천에서 난 용들이 개나 한 마리씩 키우면서 남은 인생을 마무리 지어야 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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