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풍광에 시상이 절로 …조선 문인들의 명소

▲ 절경을 노래한 회재 이언적의 시비가 서 있는 소봉대
바다는 안개 속에 몸을 깊숙이 숨기고 있다. 이런 걸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해파랑 길을 여러 번 걸었지만 이렇게 해무가 잔뜩 낀 날은 처음이다. 넓디넓은 바다를 뒤덮은 안개라니. 뜻밖의 선물에 잠시 넋을 잃는다.

누군가는 운치 있는 바다에 마음을 뺏기고 있는데 다른 누군가는 손잡이가 긴 갈퀴를 들고 미역을 건져 올리고 있다. 여행객에겐 낭만적인 곳이지만 이곳 주민에겐 노동 현장이자 삶의 터전이라는 걸 잠시 잊었다. 갈퀴로 미역을 건져 올리던 아낙이 징검다리를 건넌다. 민물이 바다로 유입되는 지점을 통과하기 위해 놓인 돌다리는 평평한 여러 개의 돌을 이어 붙여 그 모양이 꽃잎 같다.

백사장과 31번 국도를 교차해서 걷는 동안 해파랑 길 표지판은 자주 눈에 띄었다. 바위나 전봇대, 빈집 담장에 붙어 있기도 하고, 풀숲 난간이나 나뭇가지에 리본으로 묶여 있기도 해서, 그 허술함에 난감할 때도 있지만 빈틈이 있어 다소 인간적인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아 미소가 지어진다.

▲ 소봉대 찔레꽃
안개가 새털구름처럼 흘러가는 환상적인 해변을 조심스레 걷는다. 한 발씩 내딛을 때마다 발아래서 몽돌이 소리를 내고 그 틈에서 생명을 피워낸 메꽃은 청초하다. 두원리는 포항시 장기면에 속한다. 이곳 해변은 말쑥하게 면도하고 새 옷을 차려 입은 신사나 숙녀의 모습은 아니다. 그냥 소탈하다. 꾸밈없고 수수하다. 그래서 편하다. 치장하지 않은 게 매력인 이곳에서 절대 놓쳐서 안 될 게 있다면 그건 파도와 몽돌이 빚어내는 이중주다. 한 마디로 기가 막히다.

해파랑길 구간 대부분은 해안을 따라 걷게 되어 있지만 예외는 있다. 해안이 절벽이거나 군부대, 혹은 사유지일 경우는 부득불 우회하게 되어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해파랑길 12코스는 백사장과 31번 국도를 여러 번 오르내려야 한다. 골목과 대숲 길, 야트막한 언덕도 올라야 한다.

길들이 각기 다른 얼굴이라 도보의 매력을 더한다. 해안도로는 대부분 자전거국토종주 길과 연결되어 있어 힘차게 페달을 밟는 사람들과 자주 만나게 된다. 이면도로 폭이 좁고 곡선이라 자전거든 도보든 안전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운전자가 조심을 하지만 간혹 커브 길을 무섭게 달려오는 차가 있어 놀랄 수 있다.
▲ 소봉대 이언적 시비

소봉대가 있는 계원마을에 도착하니 거짓말같이 해무가 걷혔다. 집 앞에 의자를 내놓고 앉은 동네 어르신 한 분을 만났다. 백발에 바이올렛 셔츠를 입은 할머니는 낯선 여행객이 건네는 인사를 반갑게 받아 주신다.

“저곳이 들입(入)자 형태라 한때는 복이 마을로 전부 들어왔어요, 그래서 들어오는 사람마다 다 잘 살았어요.”

소봉대를 가리키며 눈을 초승달처럼 뜨고 깊은 상념에 잠기신다. 주름진 얼굴이 번성했던 과거의 어느 한때를 그리워하는 것 같다. 파도는 거칠지 않았고 마을은 평화로웠다. 주변 풍광이 뛰어나 조선의 문인들이 머물며 시를 지은 곳으로 유명하다. 소봉대 앞에 가면 이황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조선 중기 성리학자 이언적의 시비를 볼 수 있다.

대지 뻗어나 동해에 닿았는데
천지 어디에 삼신산이 있느뇨
비속한 티끌 세상 벗어나고자
추풍에 배 띄워 선계를 찾고 싶


계원리등대 표지판
해무가 걷힌 바다는 푸른빛을 되찾았다. 찔래꽃이 핀 이면도로를 지나 아일랜드 펜션 앞을 지났다. 중풍 치료의 명의로 알려진 한의사 손재림 씨가 폐교를 매입해 화폐와 한의학 등을 모아 만든 전시관이 보였다. 들어가 볼까 했는데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닫힌 지 꽤 오래된 것 같다. 대나무가 많은 동네라서 노을빛을 받은 댓잎이 황금빛으로 서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골목을 내려오니 오른쪽에 계원리 등대 이정표가 보인다.

입구만 봐서는 그리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아 그냥 지나칠까 했는데 오솔길이 마음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큰 기대 없이 들어섰다. 아뿔싸. 안 봤으면 어쩔 뻔 했나 싶다. 들어갈수록 깊이 빠져든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좁은 길은 순수, 그 자체다. 삐죽삐죽한 풀과 길손을 반기듯 양 옆으로 늘어 선 빨갛고 노란 꽃. 언덕 아래로는 계원리 해변이 시원스레 펼쳐져 있고 송림 사이로 양포항도 보인다.

양포항
산딸기는 요염한 붉은빛이고 양지꽃은 청초하다. 마음에 충전이 필요하다면 자연과 교감하며 이 길을 걸어보는 것도 괜찮지 싶다. 들뜬 여행객의 마음을 읽기라고 한 걸까. 보랏빛 엉겅퀴가 고개를 살짝 숙인다. 나물도 되고 약도 되는 엉겅퀴는 스코틀랜드의 국화다. 위기에 빠진 스코틀랜드를 구했다 해서 나라를 구한 꽃이라는 일화가 있다.

산모롱이를 돌았다. 순간, 탁 트인 초원이 깜짝 선물처럼 나타났다. 풍경 끝에 걸린 등대보다 싱그러운 초원이 더 매력적이다. 문제는 그곳에서 소를 만날 수 있다는 거다. 큰 눈을 끔벅이며 풀을 뜯고 있는 소와 마주쳐 잠시 당황할 수 있지만 놀랄 필요는 없다. 꽃창포가 무리지어 핀 환상적인 초원에 묶여 있어 아주 순하다. 멈칫대며 주저하는 여행객을 보면 알아서 길을 열어주는 배려심도 있다.

임수진 소설가

저녁노을은 예쁘고 바람도 시원했지만, 갈 길이 바쁜 탓에 지난밤에도 조업을 나간 어선이 길을 잃지 않도록 수초에 한 번씩 깜빡거렸을 등대와 눈을 맞춘 뒤, 양포항으로 향한다. 계원1리 공동작업장을 지나 다시 해안도로로 올라선다. 양포항 0.9㎞란 이정표가 보인다. 오늘 여행의 종착지다. ‘포항의 미항이라 불리는 양포항은 저녁노을을 받아서 따스해 보인다. 주말이라 가족 단위의 여행객과 낚시를 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바다에도 역이 있는데 양포항이 바로 그곳이다. 어촌어항복합공간으로 조성된 이곳은 포항의 마리나다. 단순 요트 계류장이라기보다는 상업시설과 관광 기능이 두루 포함된 곳이다. 해변 산책로에 가로등이 켜지고 캠핑장에서는 고기가 익어간다. 바다 위에 지어진 해상 공연장 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해맑다.

☞여행자 팁
해파랑 12코스는 해안선과 31번 국도를 번갈아 걸어야 한다. 어찌 보면 단순하고 특색이 없어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고요해서 사색하기에 더없이 좋다. 그렇고 그런 등대려니 생각할 수 있는 계원리 등대는 등대로 가는 길이 기대 이상이니 놓치지 말길.

☞특별한 숙소
계원1리 ’삼덕 여관‘ 장미넝쿨과 장독대가 정겨운 백년 넘은 황토집이다. 단점이라면 숙박은 새로 지어진 옆 건물에서 해야 한다는 것. 본채에서 잘 수는 없지만 숙박 손님은 장미넝쿨이 예쁜 황토집 앞마당에서 고기 정도는 구워 먹을 수 있다. 주인아저씨가 수석 수집가인지 아기자기한 돌이나 조각품이 여관 입구서부터 쭉 진열되어 있다. 삼덕 여관 054-276-0051.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임수진 소설가
조현석 기자 cho@kyongbuk.com

디지털국장입니다. 인터넷신문과 영상뉴스 분야를 맡고 있습니다. 제보 010-5811-4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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