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에 화상 입고 엄마 찾던 학도병 아직도 꿈에 나타나···"

전쟁 당시 장해정 할머니가 도움을 받았던 경주 모자원
6·25전쟁 당시 전국 각지에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

총탄이 날아드는 전선에서 싸운 군인과 학도의용병, 보급품 운반을 위해 탄약을 지게에 지고 산을 오르던 노무자들 모두 무자비한 폭력에 맞서 싸운 용감한 영웅이었다.

또 이들뿐 아니라 후방에서 또는 전방 야전부대에서 보살피며 다친 군인들을 살리기 위해 악전고투를 한 여성 참전자들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강수자 할머니
△야전 병원에서 1·4후퇴까지

“온몸에 화상 입고 ‘엄마, 엄마’부르던 학도병이 아직도 가끔 꿈에서 나타나...”

1950년 6·25 당시 영덕에 자리 잡았던 수도사단 26연대 3대대 야전병원에서 군속 간호보조로 참전해 1·4후퇴까지 경험한 강수자(87)할머니.

영덕이 고향인 강 할머니는 6·25전쟁이 터질 당시 영덕 창포국민학교의 교사였다.

당시 20살의 강 할머니는 “사변이 터져서 차차 내려온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여기까지 내려온다는 건 설마 했지”라며 당시 분위기를 술회했다.

이어 “애들 가르치던 학교에서 바다가 보였는데 어느 순간 바다가 까맣게 변했어. 알고 보니 배를 타고 오는 피난민들이 그렇게 보였던 거지”라고 말했다.

그녀는 전선이 영덕까지 밀리면서 어머니와 두 동생을 데리고 포항으로 몸을 피했고 가족을 친척에게 맡긴 후 아버지를 찾으러 영덕으로 다시 올라가던 중 길이 끊기면서 전쟁에 휩쓸리게 됐다.

영덕으로 올라갈 길을 찾던 그녀의 눈에 띈 건 한 창고.

강 할머니는 “창고 근처를 기웃거리는데 군인들이 부상자, 전사자를 놓고 또 가고 또 가고 하는 거야. 그런데 중대장쯤 되는 사람이 혼자 후라시 하나 놓고 응급치료 하는데 도저히 그냥 못 보고 있겠어 그 길로 들어가서 일을 했지”라며 전쟁에 참전하게 된 상황을 설명했다.

그녀가 소속된 수도사단 26연대 3대대 야전병원은 전투가 벌어진 산 아래에 대기하며 전선에 싸우다 다친 군인들을 보살폈다.
전쟁발발 전 오옥균할머니의 학창시절(첫째줄 왼쪽에서 첫번째)
그녀는 “부상자들을 창고 같은데 놓아두면 막 고함치고 그러다 조금 있으면 조용해지는데 그 사람들은 죽은 거라”면서 “군번 찾아서 시신 정리해서 후송했지”라고 말했다.

이어 “계속해서 부상 당한 사람이 내려오는 데 의무관들도 소독하고 수술하는 건 꿈도 못 꿔. 허연 가루(지혈제) 막 뿌리고 붕대 매고 보내는 게 다야”라며 처참한 전쟁 모습을 묘사했다.

강 할머니는 “새파랗게 어린 학생이 ‘아이고 엄마 보고 싶다. 내가 이래가 죽을지 모르는데도 엄마는 이거 모를 거다’하면서 울고 그러는데 사람 혼이 반쯤 빠져 있어 근처에 있으면서 듣고만 있지 울고 그런 것도 없어”라며 회상했다.

밀고 밀리던 전쟁이 계속되던 어느 날 전선이 뒤로 밀리면서 부대는 흩어지고 강 할머니는 오갈 때 없이 버려졌다.

그녀는 “숨어서 시내를 보는 데 총소리가 ‘드드드륵’하면서 미국 군인들이 다 죽어있더라”며 “낮에는 산에 숨어있다가 밤이 되면 마을에 내려와서 빈집에 들어가 자고 그랬지”라며 말했다.

그러던 중 할머니는 군인들이 상륙해서 전선이 올라간다는 소식을 듣고 예전 부대를 찾아 다시 군대로 복귀했다.

이리저리 부대 찾아 다니며 군인들과 함께 밤으로 기차 타고 배를 타고 북진하던 그녀는 군속으로 야전병원에서 근무했다는 증명을 처음으로 받게 됐다.

그러던 중 1·4후퇴가 터졌다.

강 할머니는 “북진할 때는 마음이 많이 푸근했거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주먹밥 2~3개 주고 누빈 군복이랑 털모자 달랑 쓰고 그대로 쫓겨 내려왔다”면서 “어딘가 어딘지도 모르고 군화 소리만 따라 후퇴하는 데 걷지도 못하는 사람들 다 놔두고 와야 했다”면서 눈시울을 훔쳤다.

그녀는 “차에 더 이상 사람이고 짐이고 들어갈 때는 없는데 눈구덩이에 앉아만 있는 사람들이 ‘느그들만 가노’그러는 데 할 말이 없는 기라”라고 그때를 떠올렸다.

그렇게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면 도착한 곳은 흥남.

두만강서 내려오는 데 며칠이 걸렸는데 마을에는 피난민들이 가득 몰려 있었고 사람들은 이리 저리 둘러보며 가족들을 찾기 바빴다.

강 할머니는 그런 혼란 속에 부대에서 낙오돼 피난민 속에 섞여 지내다 이들을 구하러 온 미군 배들을 타고 귀향길에 올랐다.

그녀는 “갑판 위에까지 사람들이 꽉 차서 발 디딜 데도 없는데 아침이 되면 몇 사람씩 얼어 죽는 사람이 나오는 기라. 바다에 수장하고 배는 계속 가는 데 ‘안 죽으면 산다’그런 식이었지”라며 회군 당시를 설명했다.

다행히 무사히 사나흘 간의 항해 끝에 부산에 도착 군복 속에 있던 군속 증명으로 신원을 증명할 수 있었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할머니는 “아직도 가끔 그대 그 기억들이 떠오른다”면서 “그때 다친 군인들과 남기고 온 군인들이 무사했길 바랄 뿐”이라고 회상했다.

장혜정 할머니
△치열했던 낙동강 전선.

“누님, 누님. 우리 좀 살려주시오”.

경주 제18육군병원 군속 간호보조 장혜정(84)할머니는 경주 제18육군병원에서 휴전이 될 때까지 부상자와 함께했다.

함북 성진시 함천리가 고향인 장 할머니는 6·25전쟁이 터지자 단신으로 월남해 부산 피난민 수용소를 거쳐 경주에 정착했다.

당시 전선과 가까웠던 경주에는 중환자들이 몰리면서 서울에서 피난 온 의사부터 이북에서 온 의료진까지 있었지만, 간호인력이 부족했다.

장 할머니는 “병원에는 전쟁 당시 지원 나간 경주 학생들이 제일 많았는데 온몸에 화상을 입어 팔다리가 다 떨어져 나간 사람이 많았지. 하루에도 몇 사람이 돌아가셨지”, “부상 당해 온 사람들은 거의 다 학도병인데 애들이 비명 소리가 들리고 살려달라고 하면 그 비참한 심정은 말도 못해. 지금 80살이 다 됐는데도 아직 그래”라며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이어 “당시에는 우리도 어렸으니깐 간호사라도 안 불렀어. ‘누님, 누님’그러면서 살려달라는데 마음이 아팠지”라며 “저녁으로 위생병하고 주사 놓으러 나가려 하면 붙잡고 ‘조금만 더 있어 달라고, 옆에 있어 달라고’간곡하게 부탁해서 앉아서 달래주고 그랬지”라고 회상했다.

그녀는 “다 나아서 제대하는 사람들을 보면 기쁘고 좋지만 이름도 없는 중환자들은 전쟁이 끝날 때 까지 병원에 계속 있었거나 거의 다 돌아가셨지”라고 설명했다.

장 할머니는 “학도병들은 소속도 없고 해서 참전 사실 확인받으려면 고생이 많았지. 총도 쏠지 모르고 수류탄만 들고 적진에 들어간 아이들이 많았는데”라면서 “가끔 병원에 있었던 학도병환자들이 참전확인 때문에 연락 오기도 하는데 같이 찍은 사진도 있어야 하고 그게 잘 안돼. 도움이 됐으면 좋겠는데”라고 안타까워했다.

오옥균 할머니
△군인 곁을 지키는 간호장교로

1950년 6월 25일 라디오에서는 뉴스특보가 흘러나왔다.

휴가·외박 나온 장병들이 귀대하기 위해 큰길에 모여들었고 도로는 피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서울이 고향인 오옥균(84)할머니는 그 날 저녁부터 들려오던 대포 소리를 아직도 기억했다.

그녀는 “기마대 중대가 대포 소리 나는 곳으로 말을 타고 달렸는데 돌아올 때는 말은 온 데 간 데 없고 돌아온 사람도 얼마 없더라”면서 당시를 회상했다.

다음날 오 할머니는 가족과 피난길에 올랐고 한강철교가 폭파됐다는 소식을 듣자 전쟁을 실감했다.

가족들이 모두 안전한 곳으로 피난을 마친 뒤 오 할머니는 육군간호사관 학교 벽보를 보고 홀로 부산으로 떠나 간호학교에 들어갔다.

120명의 동료들과 함께 간호수업과 실습을 마친 뒤 국군간호장교로 임관한 오 할머니는 마산 제1육군병원에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하루에 200여 명이 넘는 부상병들이 전선에서 들어오는 데 위생병과 함께 환자를 돌보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 오옥균 할머니가 간호장교시설 동료들과 찍은 사진
오 할머니는 “의사들은 수술하기 바빠 일반 환자들은 간호장교들이 다 돌봐야 했다”면서 “밤이 되면 병동에서 환자들이 간호사를 찾기 바빴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특히 파상풍 환자들은 우리가 손을 쓸 수도 없었다”면서 “농(고름)이 대야로 나오는 데 ‘엄마 좀 불러달라’고 하다가 하루만 지나면 말도 못하고 물도 못 먹다가 그렇게 가는 거야”라며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어 “18살 학도병이 있었는데 농사짓다 끌려와서 총 한번 못 쏴보고 수류탄 하나 들고 전쟁에 참전했다가 손 하나 잃고 들어왔었다”면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고 안타까운 사연이 많았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마산 제1육군병원에서 휴전을 맞은 그녀는 이후 온양 109육군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전쟁 후에도 환자들을 돌봤다.

오 할머니는 “그때 후방에 있던 우리도 끔찍하다고 생각했는데 전선에 있던 병사들은 오죽하겠냐”며 “후송된 환자들이 다 회복하고 돌아갔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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