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김씨왕가의 시조 김알지=성한왕

흥덕왕릉비편

신라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에는, 처음에 문무왕의 업적을 적고 그 왕가의 연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즉, “신라임금의 신령스런 근원은 화관지후(火官之后)...영이(英異)한 투후(?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傳七葉)”란 글자 다음에, “15대조(十五代祖)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둥근 하늘에서 내려와 신령스런 선악에서 탄생하여 임하시니(十五代祖星漢王降質圓穹誕靈仙岳肇臨)”라는 구절이 이어진다.

이 짧은 구절에서 우리는 신라의 역사를 거슬러 읽어내야 한다. 마치 암호나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투후 김일제에 관하여는 전회에 이미 기술하였는데, 흉노의 왕족으로 상당히 훌륭한 인물이었다고 여겨진다. 그 다음, 7대를 전한다는 ‘전칠엽(傳七葉)’, 즉 일곱 입새를 전한다는 글은 화관지후 등 그 전대의 역사에 관한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십오대조성한왕강질원궁탄영선악조림(十五代祖星漢王降質圓穹誕靈仙岳肇臨)”이란 문자의 뜻은 문무왕의 15대조인 성한왕이 하늘에서부터 신라의 신령한 선악으로 강생하여 태어나셨다는 것이다. 문무왕의 15대조를 추급하면 김알지의 아들 세한(勢漢)이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김세한(金勢漢), 삼국유사에는 김열한(金熱漢)인데, 열한과 세한의 한자 모양이 비슷하므로, 삼국유사의 필사나 판각과정에서 일어난 오기 또는 오식으로 보인다.

그러면 김세한과 성한왕은 같은 인물인가 아닌가가 문제된다. 기존의 기록으로는 신라 김씨왕가의 시조는 김알지공이었다. 이 기록은 고려시대의 것이고 신라 당대의 금석문에는 신라왕실의 시조가 성한왕으로 새겨져 있다. 대표적으로 신라 ‘흥덕대왕묘비’에는 흥덕왕이 태조 성한(星漢)의 24대손이라고 되어있다. 이외에도 성한왕은 ‘김인문묘비’,‘진철대사탑비문(眞澈大師塔碑文)’, ‘진공대사탑비문(眞空大師塔碑文)’에 등장한다. 그런데 성한과 세한의 발음이 비슷하고 동일인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농후하다. 한편 김알지와 김세한은 탄생설화가 비슷하고 신라 금석문에 김알지 대신에 성한왕으로 되어 있으므로 역시 동일인일 수도 있다.

투후와 성한왕은 삼국통일 이후 김씨들이 자기들의 조상으로 미화하였을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그러나 하필 반역의 대명사인 왕망을 도운 인물을 설정하여 조상을 미화시켰다는 설은 동의할 수 없다.

신라왕계와 흉노는 서로 공유하는 문화가 많다. 신라토기 기마인물상의 말등에 있는 동복은 흉노의 풍습이다. 모두 금을 존중했고 잘 다루었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중국 산동성 하택시 성무현 옥화묘촌 지금도 투국의 유적이 있다. 이곳 주민들은 투국성을 ‘김성(金城)’이라고 하는데, 우연인지 신라의 수도 ‘금성(金城)’과 일치한다. 김일제의 어머니를 ‘알지’라 부르는데, 김알지와 이름이 같고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과도 음이 비슷하다. 알지는 알타이문화와 관계가 깊다. 알타이 역시 금(金)을 뜻한다.

중국 감숙성 무위현에 가면 김일제의 석상이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우리와 너무나 닮았다. 이곳에는 김씨들이 집단 거주한다. 무위는 한나라 시절 흉노의 휴도왕이 다스리던 지역이다. 현재 타타르 공화국, 부리야트 공화국, 카자흐스탄 등 유라시아대륙의 유목민은 텡그리를 숭배하는 문화가 있다. ‘텡그리’는 ‘하늘’ 또는 ‘하늘을 대신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인데, ‘단군’의 기원이라는 설도 있다(텡그리-당굴-단군). 이제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도 우리문화의 원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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